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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나요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

by aboutseohyeon

[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나요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추측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이 전제는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물리적으로 시간은 동일하게 흐른다. 하지만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개개인이 느끼는 시간만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지난 3월 13일 오픈된 <소년의 시간> 속에서도 시간은 너무도 다르게 흐른다. 4부작으로 공개된 <소년의 시간>은 같은 반 친구의 살해용의자가 된 13년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드라마가 주목받은 이유 중 하나는 4회 차 모두 ‘원 테이크’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소년을 체포하고 절차를 밟는 시간을, 2부에서는 증거를 찾기 위해 학교를 찾는 경찰의 시간을. 3부에서는 소년과 마주한 심리학자의 시간을, 4부에서는 남은 가족의 시간을 다룬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목도하고 있는 듯한 이 지난한 시간은 너무도 초조하게 흘러가기도, 숨이 막히게 빠르게 흘러가기도,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답답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이때 드라마는 어떤 감정도 유발하지 않겠다는 듯 건조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사건을 따라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시청자들의 감정은 요동치고 만다. 이 지점에서 지루하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지만 세계적인 인기를 생각하면 많은 이들에게 통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시간이 그토록 많은 이들의 찬사를 끌어낸 건 ‘원 테이크’로 흘러가는 동시성 때문만은 아니다.


<소년의 시간>에는 사건 이후 흘러가는 시간 외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이 시대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이고,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다 결국에 인정하고 마는 그 시간이 아니라 그가 처한 시간 혐오로 물든 그 시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1부에서 소년의 체포는 법률에 따라 차례차례 진행된다.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는 제이미의 태도와 달리 경찰은 확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동시에 미성년자 범죄를 다룰 때의 조심스러움도 잊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절차에 맞게 확인을 거쳐 진행된다. 부모의 당혹스러움도 절차를 따라간다. 후반부가 되어서야 체포된 제이미가 칼에 찔려 죽은 아이와 만나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1부가 끝날 때까지도 제이미가 진범이라 확신하기 어렵다. 2부가 되어서야 그 이유가 밝혀진다. 정황과 모든 게 분명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 못하던 경찰은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난 후에야 제이미가 인셀(비자발적 미혼)로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이들은 80%의 여성은 상위 20%의 남성을 만난다는 ‘20:80:의 법칙, 영화 매트릭스를 이용해 남은 남성들은 영원히 연애를 할 수 없을 거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자신들끼리 이모티콘과 함께 혐오를 주고받는다. 혐오는 SNS를 통해 벌어지며 여성을 향한 폭력이 벌어지고 만다. 어른들은 이들의 행태를 보면서도 그 속에 있는 혐오를 읽어내지 못했고. 그 말을 전해 듣고도 고작 13살에게 벌어지는 일이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결국 살인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제이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건 3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3부에서 제이미는 심리 상담사와 상담을 진행하는데, 이때 심리 상담사는 젊은 여성이다. 제이미는 고작 13살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을 상대로 마음껏 분노를 표출하고 불쾌한 감정을 이끌어 내는 말들을 쏟아낸다. 짧게 등장하는 경비원들의 태도는 또 어떠한가. 그들이 과연 어린 혐오론자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듯 이 드라마의 전반에는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혐오가 깊숙이 내재되어 있다. 4부에서도 다르지 않다. 제이미의 재판을 앞둔 가족들의 일상은 망가져 있다. 자동차에는 낙서 테러가 이루어졌고, 이 낙서를 대하는 가족들도 분노를 감당하는 자세는 제각각 다르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생일 상을 차리려는 딸의 모습을 보며 '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이 키웠다'고 하지만, 의문을 남기긴 마찬가지다. 어린 제이미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제 죄를 인정하겠다 고백하면서도 엄마와 누나가 함께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화제를 돌린다. 평범한 듯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이미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혐오를 읽어낼 수 있다.

제이미의 문제는 단 한 명의 잘못이 아닌 그와 관계된 모두, 부모, 친구, 학교, 현대 사회의 군상이 함께 만들어낸 일일 것이다(제이미의 잘못은 너무도 분명하며, 그를 정당화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고, 이 드라마에서 역시 그를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면 3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년의 시간>은 이 혐오를 소리 내 고발하지 않는다. 안일한 대책을 쏟아내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를 조용히, 그리고 고스란히 보여준다.


드라마는 어떤 정답도 내지 않은 채 우리에게 묻는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과연 혐오를 멈출 방법이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선 이 문제를 똑바로 봐야 할 것이라는 걸 드라마는 분명히 한다. 이 시간을 끝내기 위해선 우리는 어떤 시간을 살아야 할까. 어쩌면 그 시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차곡차곡 흘러가는 시간은 13세 소년을 또 다른 어른으로 만들어 낼 테니. <소년의 시간>에서 ‘원 테이크’라는 기법이 놀라움을 낳는 건 단순히 기술적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현상을 지켜보는 것. 바로 그 지점에 이 드라마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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