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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고통을 나눌 수 있나요

영화 <리얼 페인 A real pail>

by aboutseohyeon

[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고통을 나눌 수 있나요

영화 리얼 페인 A real pain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남자가 공항에 앉아 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 나 홀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얼굴이다. 어딘가 멍하고 어딘가 혼란스러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법한 얼굴로. 그리고 정신없이 공항으로 오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그는 택시 안에서 일 분도 참지 못한 채 쉴 새 없이 전화를 걸며 상황을 설명한다. 벤지(키에란 컬킨)와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다. 두 사람은 공항에서 서로를 만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얼굴을 감춘다. 여행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은 시작부터 분명해 보인다.


두 사람의 여행지는 폴란드. 돌아가신 할머니의 고향이다. 홀로코스트의 역사가 남이 있는 그곳. 데이비드의 신청에 따라 그들은 역사 투어를 함께 한다. 그들이 할머니를 잃은 것처럼 다른 이들 역시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투어를 신청했다. 때때로 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어떤 이들은 고통의 역사, 정확히 고통을 이겨낸 역사를 찾는다. 이겨낸 자에 대한 경의이자 고통의 공감, 그로써 다른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란 일말의 기대 때문일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투어 자체에 주목하지 않는다. 투어를 겪어 나가는 두 사촌의 모습을 통해 묻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고통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숫자와 기록으로 나열된 역사 앞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고통을 안아줄 수 있을 것인가. 고통 앞에 우리는 혼자인가 함께인가.


첫 장면에서 벤지부터 보인 것과 달리 영화는 데이비드의 시선을 따라간다. 데이비드는 아내와 딸을 두고 착실하게 모범적인 하루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힘들어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사소한 일탈마저 도덕적 판단 앞에 망설인다. 그에 반면 벤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큰 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큰일도 사소한 일탈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데이비드를 움직이게 만드는 인물이다. 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며 지금의 고통에 빠져 있는 건 데이비드가 아닌 벤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껏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었다가도 한순간에 찬 물을 뿌리고 마는 벤지에게 지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바로 그 때문에 어김없이 벤지의 행동에 동참하고 마는 데이비드 때문에 지난 벤지의 행동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은 없어.”라고 말하며 기꺼이 혼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벤지는 끝내 혼자 있기를 택한다. 그의 고통은 그의 입으로 자세히 풀이되지 않는다. 그저 데이비드의 말과 벤지의 얼굴을 보며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나 고통에 빠진다. 이 단순한 문장은 삶의 진리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크건 작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고, 가끔 사람들 사이 그 고통을 잊는다. 위로받고 위로하며. 웃고 떠들며. 그렇게 잠시 흔적을 감추었던 고통은 또다시 되살아나고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끝내 고통이 우리 곁에 머무는 무언가라면, 우리는 고통 앞에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명쾌히 해주지 않는다. 그저 고통의 여정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데이비드가 벤지와 함께 했던 여행처럼.


어떤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영화는 감지하지 못하는 여파를 남긴다. 리얼 페인은 후자다. 작은 여행을 다녀온 후, 일상의 틈틈이 문득 떠오르게 만드는 잔잔한 여운이 깊숙이 새겨진다. 지금 내 삶엔 어떤 고통이 새겨져 있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고통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동시에 꼭 혼자서만 짊어져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잠시나마 옆을 함께 걸어줄 수는 있다. 어쩌면 그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 최선은 늘 마음 한 구석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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