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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당신은 정말 모르고 있나요?

넷플릭스 <당신이 죽였다>를 보고

by aboutseohyeon

당신은 정말 모르고 있나요?

<당신이 죽였다>를 보고



* 이 글에는 스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오랜만이다. 이토록 천천히 서사를 쌓아 올라가는 추리물이라니. 1화가 끝나기 전에 사건이 벌어지고, 쫓기듯 사건을 따라가는 게 요즘의 추리 드라마였다면, <당신이 죽였다>는 정확히 그 반대 지점으로 달려간다.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서사를 쌓아 올린 후에야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에 불안한 듯 잠시 맴돌다 이내 사건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질주가 시작된다.

<당신이 죽였다>는 소설 『나오미와 가나코』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다. 가정 폭력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2017년에 다루어진 소재가 2025년에도 여전히 먹힌다는 사실은 꽤나 씁쓸하게 다가온다. 물론 드라마적 설정과 주변 캐릭터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여성 캐릭터의 적극성이다. 오직 남성에게만 의지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이 아닌, 사회에서 제 몫을 다 하며 자신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여성 캐릭터를 포진함으로써,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행의 문제가 오직 ‘폭행’에 있음을 지적한다. ‘가정 폭력’의 서사를 겹겹이 쌓는 것에 어떤 피로감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주제 의식을 살렸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서사 전환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당신이 죽였다>의 중심 사건은 희수가 당하고 있는 가정 폭력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곧장 희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희수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폭행을 보고 자란 은수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마치 불필요한 묘사처럼 보이는 은수의 삶은 드라마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아주 주요한 장치가 된다. 은수가 자신의 일이 아닌 희수의 일에 뛰어들어 살인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희수의 사건을 겪기 전까지 은수 역시 늘 ‘방관자’의 역할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우리들처럼. 은수는 어렸을 때부터 옷장에 숨어 엄마가 당하는 폭행을 모른 척해왔고, 근무하는 백화점에서도 갈등 없이 ‘잘’ 해결하기 위해 불의를 기꺼이 참는 인물이다. 이 모든 건 은수 자신의 안위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희수는 어떠한가.

희수는 무력한 인물도 체념적 인물도 아니다. 동화 작가라는 직업도 있으며, 신고를 해보려고도 도망쳐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집착적인 폭행 앞에 어김없이 무너진다. 무엇보다 가까운 가족들은 침묵을 강요한다. 대통령 실에 들어가길 원하는 형사 노진영은 오빠의 폭행 사실을 알고도 희수에게 “소용없으니, 신고하지 말라.”라고 한다. 시어머니는 또 어떠한가. 성공적인 여성으로 언제든 가정 폭력에서 여성을 도와줘야 한다고, 조금만 움직이면 도와줄 사람이 많다고 강연을 하면서도, 며느리의 상처에는 왜 또 넘어졌냐며, 조용히 살기를 강요한다. 희수의 어머니는 투병 중으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어 희수의 약점이 될 뿐이다. 이렇게 온전히 고립된 환경 속에서, 희수는 결국 죽기를 선택하고, 그 죽음을 막는 은수가 희수에게 손을 내민다. 차라리 남편을 죽이자고.

“죽긴 왜 죽어. 죽어야 할 사람이 죽어야지.”


완벽한 계획


희수의 결심에 은수는 계획을 실행한다.

희수의 남편 노진표와 똑 닮은 불법체류자를 섭외해, 상하이로 출국시킬 계획을 짜고, 이에 따라 남편의 횡령 사건까지 조작한다. 이는 마치 합당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완벽한 계획 아래 포함되는 사람이 오직 ‘남편’ 뿐만이 아니라는 것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의심이 오르기 시작할 때, <당신이 죽였다>는 죽음을 앞둔 은수와 희수와 남편의 최후의 대결을 보여줌으로써 ‘누군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희수의 예언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희수의 마지막 행위는 잔인함 앞에 한없이 처절하게 다가온다. 이쯤 되면 드라마의 제목은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당신이 죽인 건 누구일까. 오직 살해 피해자를 말하는 것일까. 살인을 저지르면서 사람의 내면 한 구석은 죽을 수밖에 없다. 이를 증명하듯 희수는 자신의 손을 끊임없이 닦아내며, 고라니 시체를 보고 남편의 모습을 떠올린다. 은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를 묻었던 날을 떠올리고 괴로워하며, 환각에 시달린다. 두 사람 속 내면 한 구석은 죽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시체를 묻고 돌아온 두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비로소 해가 떠오르는 모습에도 불안감은 왜 증폭되는 것일까.

극의 반환점에서 악이 처단되고, 이제 남은 건 과연 두 사람이 계획대로 무사히 이 사태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이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아랫집과 사장님 그렇게 두 사람으로부터 의심은 시작된다. 빠져나가는 은수를 의심하는 경비원의 눈빛, 그리고 집까지 찾아와 오빠를 찾는 노진영까지. 이제껏 철저하게 희수의 고통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희수의 목을 졸라오기 시작한다.

삶과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희수가 얻고 싶었던 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친구와 떡볶이를 먹고, 감옥과 같은 집에서 버티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전화가 울릴 때마다, 남편이 퇴근했던 시간마다 두려움에 떤다. 그렇게 희수가 맞이한 평화는 한없이 위태롭다.


우리가 지키려 하는 것


남편을 연기했던 장강이 돌아오며 드라마는 전환을 맞는다. 그는 노진표의 죽음을 알고 있으며, 이를 대가로 은수와 희수에게 돈을 뜯어내려 한다. 위협은 장강에서 끝나지 않는다. 형사 노진영이 사건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노진영은 오빠의 폭행은 쉽사리 눈을 감으면서도, 사생활은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하는 인물이다. ‘잡음’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 그 잡음이 자신의 앞길을 망치지 않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다. 결국 오빠 노진표의 죽음을 알게 된 후에도 합당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상수라면 변수를 바꿔야지.”

이러한 노진영의 모습은 극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노진표는 죽을 만한 놈이었지만, 그렇다고 은수와 희수의 잘못이 희석되진 않는다. 그들은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그 살인을 이용해서, 장강은 물론 희수에게 자살을 종용하는 모습에, 노진영이 내던진 진실을 시청자 역시 굳이 다시 주워 들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노진영의 목표까지 밝혀지며, <당신이 죽였다>는 결말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은수와 희수의 목을 졸라 오는 노진영, 은수와 희수를 도와주려는 조력자 사장님까지. 드라마는 원작과 사뭇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를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드라마에서 모든 인물은 합당한 책임을 지게 된다. 이는 도덕성을 중요시하는 드라마 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들의 범죄가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연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엔 어떤 이윤도 추구하지 않은 채 오직 진실만을 따라가는 인물도 존재한다. 그 인물을 통해 방관자의 선을 넘어설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거다.

중요한 건 같은 결말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진영과 은수와 희수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나를 지키려는 자와 타인을 지키고 싶은 자가 보일 수 있는 결말이 완벽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없이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던 두 사람의 평화는 비로소 진짜의 얼굴을 하게 된다. 세상엔 따뜻한 사람도 있다. 언제나 우린 그걸 너무도 어렵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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