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17. 기독청년의료인회 성서나눔
4월 17일에 제가 참여하는 기독청년의료인회 성서나눔 시간에 나눈 이야기입니다. 쫌 많이 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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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말아라
마태복음 6장 강윤식
여는 기도
<함께 읽을 말씀>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32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새번역)
들어가면서
다들 걱정해 주시는 대로 의사 증원 사태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힘들기보다는 답답한 날들이라고 해야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데, 전공의들이며 학생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만 늘어지고 있습니다. 당장은 제가 책임 맡고 있는 학교의 교육여건이 어떻게 될지가 제일 걱정이지만, 대학병원이며 거기서 치료받는 환자들, 나아가서는 이번 사태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린 필수의료 공급체계까지를 생각하면 참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학장이 되고 나서 브런치에 ‘어쩌다 학장’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kys513/47). 학장이 되는 과정에 대한 일종의 소감문인 셈인데, 학장이 되면 ‘에헴’이나 하고 있으면 되려니 하다가 이렇게 힘든 일을 겪고 있으니 ‘근데 왜 학장하려고 했지?’라는 걸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당장 떠오르는 개인적인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역시 공명심입니다. 학장도 나름 벼슬이라면 벼슬이니 뭔가 뽀대 나는 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요. 두 번째는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원래 열심히 하지 않던 연구는 거의 손을 놓은 실정이고, 학생들 교육과 강의는 해 오던 관성이 있으니 그냥저냥 해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점점 별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거 아닌가 하던 차에, 더 나이 들기 전에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은 더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전공한 예방의학, 그중에서도 의료관리학은 의료 부문에서의 정책이나 조직관리 등을 다루는 학문이므로 교수들과 학생들의 업무를 조율하는 일, 학교의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조직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다른 임상가들보다는 좀 더 나은 점이 있지 않을까라는 교만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첫 1년을 돌아보면 이런저런 행사도 새로이 하고 하면서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런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어쨌거나 힘이 들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래도 예방의학 전공자가 학장 맡고 있는 게 조금은 더 상황의 이해와 수습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라고 위안을 해 봅니다만,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요ㅠㅠ
1.
그러다가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 6장을 읽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은 산상설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가장 큰 주제이자 이야기의 머리가 되는 복에 대해서 이00 선생님께서 지난 모임에서 깊게 묵상해 주셨습니다. 직접 참가하지는 못했으나 발제문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네요.
팔복 선포 이후의 말씀들은 대부분 하라거나 하지 말라라는 윤리적, 실천적인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함께 나누는 6장은 거의 모두 신앙적인 행위와 삶에 대한 명령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처음 나오는 세 주제는 자선과 기도, 금식에 대한 명령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 세 가지가 종교적인 의무이자 수행이었다고 하고, 그래서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 지도층 인사들은 꽤 엄격하고 열심히 자선과 기도, 금식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행위가 매우 과시적으로, 남들에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행위로 변질되었답니다. 그러니까 개역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자선과 기도, 금식이라는 중요하고 거룩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외식하는 일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명하신 말씀이라는 거지요. 제 나름대로 요약하자면, ‘자선과 기도, 금식을 행하되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라’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명령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걱정하지 말아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여라’ 등입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들이지요.
그런데 잘 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얼마 전 성경 묵상을 하면서 이런 기도를 끄적인 적이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감동하고 손과 발로 실천하게 하소서”
그러고 나니 참 부끄러워졌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말씀들 중 제대로 실천하고 사는 것 같은 말씀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더군요. 오늘의 명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워낙 여러 번 읽고 들어서 잘 아는 말씀이기는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과 손발로 내려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백거이와 도림 선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백거이가 도림 선사에게 도(道)를 이룰 방편을 묻자 도림선사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諸惡莫怍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謂佛法)”라고 답합니다
(불가에서는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라고 하여, 과거의 일곱 부처님이 이 게로 말미암아 중생을 구제했다는 유명한 구절이랍니다)
뭔가 심오한 말씀을 기대했던 백거이가 실망하여 말합니다.
“그거야 세 살 먹은 동자(삼척동자)도 아는 것 아닙니까?”
도림 선사가 대답합니다.
“세 살 먹은 동자도 말할 수 있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2.
그렇기는 해도, 이 명령들을 가만히 보노라면 이게 도무지 가능한 명령일까 싶어집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랍니다. 기도할 때에는 빈말을 하지 말고(그런데 기도를 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 보물은 하늘에 쌓아두고(하늘이 도대체 어디일까요? 아니 어디이기는 한 걸까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랍니다. 뭔가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나요.
하지만, 이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들에 사실은 영적인 도약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면 우리가 하는 행위들에 아무런 집착이 없어야 하겠지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려면 쌓는다는 마음이 없이 쌓아야 하겠고, 걱정하지 않으려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아야 하겠네요.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대부분 잘 아시겠지요. 새찬송가 204장입니다. 이 찬송가 3절의 앞 부분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도대체 어떤 상태에 있으면 세상과 나는 없고 하나님만 계시는 걸까요.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상태라면 우리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어떤 집착이 남아 있을까요. 우리는 몸을 가진 사람인지라 항상 그렇게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상태를 얼핏이라도 경험하기는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선해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지고 하나님만 계셔서, 행하는 어떤 일도 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이루어질 수가 없는 자연스러움, 무위(無爲)의 행함만 있는 순간들 말이지요. 내가 없는데 남에게 보일 무엇이 남아 있을 리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3.
쓰여진 방식 때문에 마태복음 5장과 6장의 복과 명령을 시간적 선후관계, 혹은 인과관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A면 B가 따라온다” 혹은 “A를 실천하면 B를 얻게 될 것이다”로 말이지요.
이런 인과적인 논리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상식이고 구약의 언약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권선징악, 인과응보, “주님의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다”같은 익숙한 구조입니다. 그런 인과적인 논리의 결정판이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의 약속이 아닐까요. ‘이 땅에서 열심히 예수 잘 믿고 교회를(혹은 목사를) 잘 섬기면 죽은 이후에 영원한 생명과 천국이 보장된다’라는 놀랍고도 터무니없는 약속 말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나는 없이 하나님만 계신다는 이야기를 좀 더 넓혀서 풀어보면, 어쩌면 이 명령들은 인과성의 원리가 아니라 동시성의 원리가 적용되는 게 아닐까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자선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갚아주고 계시는 행위 곧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이고,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드리는 빈말 없는 기도는 그 자체가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듣고 계시는 기도이며, 쌓음과 비움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보물이야말로 하늘에 쌓아두는 보물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시간적 선후를 따지고, 이것을 행해야 그 보답으로 저것이 따라온다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저 은총일 뿐이다. 어찌하여 먹을 걱정, 옷 걱정을 하느냐...’
그런 경험들이 확장되어서 어쩌면 개체로서의 내가 죽고 사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 내가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서 내가 잠시 나타났음을 옹글게 아는 믿음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4.
이야기가 참으로 맥락 없어졌습니다. 그런 세계를 잠시라도 상상해 보아야 이 힘들고 팍팍한 현실에서 물러날 수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 힘들고 팍팍한 현실이 방편(方便)이고, 염려가 없는, 앞뒤도 선후도 없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더 실재(實在)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온전히 그리 살지는 못하지만요.
정부가 저질러 놓은 대책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 화가 나지 않을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만이 만악의 근원은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겠지요.
좀 더 정의롭고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고 노력해야겠지만, 해가 뜨고 지는 한 슬픔과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세상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은 언제나 긴장과 어그러짐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나의 슬픔과 불완전함을 통해서 다른 이들과 공명하는 삶을 사는 것, 슬퍼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있으려고 애쓰는 것,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함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경험하는 것이 우리가 신앙인이어야 할 이유라고 믿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기>
1. ‘염려하지 말아라’는 말씀이 내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2. ‘하나님만 있음’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함께 들을 노래>
원래는 본문의 말씀을 바탕으로 임석수 신부님이 작곡하고 바오로딸 수녀님들이 노래하신 ‘무엇을 먹을까’라는 노래를 들으려고 했는데, 이번 주가 세월호 10주기 주간이라 BTS의 노래를 송소희가 부른 ‘봄날’을 듣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습니다. 죄송스럽습니다만, 목사님께 선곡 고민을 넘겨 봅니다^^;
무엇을 먹을까
https://youtu.be/wT4Gf8sQYzw?si=XmW4ArAt2TotQoMi
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