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합사의 완성이라는 서로 핥아주기 (혹은 알로 그루밍 allogrooming)를 긴 가뭄 끝의 비처럼, 허기진 새벽의 만나처럼 기다려 보지만 합사 3주 차에 접어든 틸리와 나비는 밤새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자이자, 고단한 낮시간엔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인정하지만 결코 동지가 될 수 없는 톰과 제리다.
원래 사람한테도 고고하기 그지없고 독고다이가 체질인 틸리는 퍼스널 스페이스는 고사하고 자아와 타자의 경계조차 모호한 어린 고양이 나비의 존재가 무척 부대끼는 모양이다. 온밤을 불태우는 추격전 끝에 새벽이 오면 타임아웃을 부르고는,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엄마한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나비가 ‘날아오를’ 수 없는 높디높은 책장 위로 피신해서 저녁나절까지 긴 휴식과 부족한 수면을 보충한다.
원래 느긋하고 화목한 렉돌 대가족 출신인 나비는 늘 고양이의 품이 그리운 듯 야속하게 냉정한 틸리 언니를 하염없이 목 놓아 부르며 어디로 갈 바를 모르고, 담요 혹은 털북숭이 쿠션 등 폭신한 고양이 대체물을 찾아 헤매다 지쳐 아무데서나 잠든다. 자면서도 서운함이 가시지 않은 듯 핑크색 입천장과 혓바닥이 다 보이게 입을 벌리고 잠꼬대처럼 빽빽 울기도 한다. 어찌나 가여운지 내가 이 삼복더위에 두툼한 니트를 걸치고 품으로 안아 올리지만 어디 고양이만 할까.
일월도 다 가고 있는 지금, 언제나 그렇듯 연구의 뜻을 높이 세웠던 연초의 계획이 무너지고, 슬슬 너무 놀았다는 자괴감과 함께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하지만 책상에서 정자세로 정신을 가다듬는 것도 잠시, 바퀴 달린 책상 의자 밑에 아슬아슬하게 뛰어드는 나비가 신경 쓰여 아예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비는 기회는 지금이다, 의자를 타고 올라 기를 쓰고 식탁 위로 오른다. 이 녀석이 키보드 위에서 오두방정 탭댄스를 추다가 중요한 이메일에 ‘f’를 수백 개 찍어 보내질 않나 (내가 속으로 욕하는 소리를 알아차렸니?!), 남의 대출카드로 빌린 도서관 책들을 잘근잘근 씹고, 볼펜 끝을 물고 늘어져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다. 아이 키울 때 생각이 절로 난다. 백일 된 아이를 어설프게 둘러업고, 그보다 더 어설픈 영어실력으로 웬만한 사전만큼 두툼한 디킨스, 브론테, 조지 앨리엇 소설들을 영문과 수업 전에 읽느라고 마흔도 되기 전에 허리가 꼬부라지는 줄 알았는데.
평화로운 연말연시에 이 다급하고 절박한 연구자의 마음을 흩트리는 것이 화창한 남반구의 여름 날씨나 고양이들 뿐이랴. 방앗간 기계 돌아가는 소리처럼 웅웅대는 베이스가 무한 루프로 반복되는 클럽 음악을 틀어 놓고 뭘 하는지도 모르게 방문을 꼭 닫아 건 고3 학생은 한참 안 깎은 고양이 발톱보다 더 날카롭게 내 신경을 긁어댄다. 저 음침한 표정의 열일곱 처자가 정녕 열 살 이전에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을 손가락이 안 보이는 속도로 연주하던 그 총명한 아이가 맞는지 눈물이 불쑥 고일 지경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결전(벼락치기)의 금요일. 내일은 뉴질랜드 라캉 정신분석학회의 올해 첫 스터디 모임이 있는 토요일이다. 올해부터 2년 간 학회 대표(라고 쓰고 뭐든 다 맡아서 처리해야 하는 ‘이 대리’라고 읽는다)를 맡아 한층 부담스럽다. 정신 바짝 붙들고 회한의 벙커와 우울의 해저드를 피하면서 발표 준비를 끝내야 할 때다.
발 밑에서 고개를 쳐들고 나비가 ‘엄마, 엄마, 엄마’ (앵, 앵, 앵) 숨 넘어갈 듯 나를 부른다. 저만치 떨어져 앉은 틸리의 표정도 간절하다. ‘엄마, 쟤 좀 어떻게 해주세요.’ 나비의 최애 담요를 책 앞에 펼치고 토닥토닥해본다. 꾹꾹이를 하면서 오토바이 시동 켠 듯이 골골거리다 잠든다. 휴우... 한 시간만이라도 곤히 잠들렴.
2021.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