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적이고 속물적인 것을 싫어하는 내가 유일하게 남편과 보는 프로가 있으니 불륜과 막장드라마의 대표적인 드라마,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처음엔 뭘 저런 것을- 똘망똘망 진지하게 보는 남편이 신기했고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남편이 늘 혼자 티브이 시청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옆에라도 앉아 대화도 하고 장단도 맞춰 볼 요량으로 한 편, 두 편 같이 보다 보니 어느새 장단을 맞추는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미 몇 년째 찐 시청자인 남편은 극의 흐름을 귀신처럼 알아 스토리를 미리 꿰뚫고는 내게 귀띔을 해주니 손발이 척척 맞는다. 고고한 척조금은 재수 없고 밥 맛없이 굴던 나도 그냥 그런 이중적이고 속물임을 인정하긴 싫지만... 어느새 전형적인 통속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오늘도 신나게 동물농장과 우리말 겨루기 프로를 시청한 뒤 채널을 열심히 돌려 부부클리닉이란 부제가 붙은 사랑과 전쟁을 시청하는 남편. 주방에서 드라마를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 들리자마자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접시에 가지런히 담아 남편 옆에 앉는다.
거의 매번 여주, 남주는 단골 배우들이 담당하고 어김없이 마지막 씬은 배우 신구 아저씨가 이혼 조정위원회 대표로 등장해 부부의 문제를 짚고 고정멘트 "4주 뒤에 뵙겠습니다."로 극을 마무리하는 것이 공식이다. 숱한 불륜녀, 불륜남이 등장하고 배신이 난무하는-방영한 지 십 년도 더 된 이 드라마를 남편은 푹 빠져서 내가 옆에 앉는 것도 모를 정도다.
고고한 학 같은 삶은 아니더라도 평소 속물은 경멸해 왔는데... 이 사랑과 전쟁이란 드라마를 보면 어느새 배우자들의 리얼한 연기에 몰입하게 되니 좀 과하게 말하면 그동안 고상을 떤 나의 행동이 남에게 보이고 싶은 이중성이었을까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사실 사람이 저속하든 고상하든 오십 보, 백 보 일 텐데 사람마다 다른 취향과 언행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나'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섣부른 교만 아닐까.
"자기야, 자기가 좋아하는 이상형 나왔네. " 하고 웃으며 옆으로 바짝 붙어 앉으니 간 큰 이 남자 "응, 나는 저렇게 귀엽고 당돌한 여자가 좋더라. "하고 간 큰 발언을 내게 한다. 그러나 나도 그새 여우가 다 돼서 "자기야, 당돌한 여자랑 살아보셔~ 살아봐야 정신이 차려지지. 많이 골치 아플걸! "하고 가볍게 응수하고는 다시 주거니 받거니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데 이 남자가 한번 더 여주인공이 자기 스타일이라고 못을 박는 이야기를 한다.
분명 고상한 나이지만 마음 한편에서 작은 파장이 일면서 "그러면 왜 나랑 결혼했어? "하고 따지듯 물으니 남편이 웬 시비냐며 무안을 준다. 화내기는 자존심 상하는 애매한 상황이지만 나름 열받아 피곤해 먼저 잔다고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자버렸다.
눈치가 꽝이 아닌 남편이니 알아챌 수도 있었을 텐데 나의 삐침을 내버려 둔 괘씸죄가 있지만 잘 자고 일어나니 어제의 기분 나쁜 감정은 사라지고 그래도 따뜻한 밥을 먹이려 허둥지둥 서두른다.
반찬이라야 거의 된장찌개, 콩나물국, 미역국, 뭇국에서 돌아가고 가끔 버섯육개장 정도 별식으로 끓여도 식성 좋은 남편은 뚝딱 밥 한 그릇을 비운다. 속 없는 나는 오늘도 출근길에 가볍게 남편을 안으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다.
미스터리다. 남편과 나는 취향도 이상형도 참으로 다른데 어느새 같이 살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불가사의한 기적 아닐까. 난 지적이고 키도 크고 호감형인 훈남을 좋아하고 남편은 아담하고 작고 귀여운 여자를 좋아한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으니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다른 취향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런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반면에 남편은 몇 번 내게 언급했으니 내가 그 예의 없음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다.
오늘도 동생에게 전화를 해 열받은 상황을 보고하니 동생은 세상 피곤한 듯 심드렁한 말투로 맞불 작전을 하라고 지시한다. "얘 너무 유치한 거 아니니? "하고 물으니 동생 하는 말. "원래 삶이 남녀 사이가 유치한 거 아니유? 더구나 언니는 신혼인데... " 하며 깔깔 웃는다.
와 아시안컵 8강전이다. 운동은 하는 것도 보는 것도 싫어하는 나이지만 축구는 좋아한다. 남편과 사이좋게 사우디아라비아와 국대팀의 경기를 신나게 보고 있는데 상대팀 감독이 눈에 띈다. 맞불 작전 지시는 잊고 무심코 던진 말. "거 감독 분위기 있게 잘 생겼네." 하니 남편이 씩 웃으며 "자기는 저런 사람이 잘 생겼다고 생각되나 봐. 우리 찬양대 지휘자님 같은 분 말이야~"
어 이건 뭐지??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지휘자님 잘생겼다고 했는데, 이 남자가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외다.
나 역시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이 사람 마음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급 미안함이 밀려오고 남의 티끌은 보고 나의 들보는 못 본 내로남불의 교만함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세상에 이상형과 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알 수 없는 끌림으로 만나고 연애하고 가정을 꾸미는 것이 대다수의 삶이다. 난 그의 결정적인 말. 나보다 조금 오래 살아 나를 천국으로 보내주고 따라간다는 그 말에 결혼을 결심했지만 아마 남편은 다른 이유로 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끈이 남녀 사이를 엮기도 하고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친구와의 인연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이 나이 되고 보니 비로소 알겠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의지의 문제보다는 알 수 없는 끌림이 더 큰 것 같다. 하지만 만남보다 소중한 것은 관계를 가꾸는 것이란 것. 햇볕을 쏘이고 물을 주고 가끔은 바람을 쐬어 주고... 그렇게 정성을 다해야 인연은 진짜 인연다워질 것이다.
눈이 펑펑 내린다. 어두움 깔린 도시의 배경위로 포근해 보이는 눈이 쌓여간다. 저녁 식사를 마친 남편이 리모컨을 쥐고 소파에 앉는다. 나도 따라 슬그머니 앉는다. 그가 볼 프로그램이야 이제 훤히 꿰뚫고 있지만 모른 척 "자기야, 자기 좋아하는 여자 주인공 나오는 프로 볼까?" 하고 콧소리를 내어 묻는다. 눈치 제로인 남편이 싱긋 웃으며 바로 채널을 고정한다. 달라진 건 내 마음의 여유 하나. 갑자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란 시구가 떠오른다. 중요한 건 지금 내 옆에,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 우리라는 사실.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랑해, 여보야!"갑자기 터진 내 방언에 화들짝 놀란 남편이 겸연쩍게 웃는다.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눈이 와서 참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