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말수가 없는 편이다. 나 역시 말수가 없는 편이니 둘만 사는 집안 분위기는 한마디로 적막강산이다. 내가 쉽게 고쳐지지 못하듯 사람의 천성은 웬만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처음엔 집안에 흐르는 고요한 기류가 싫고 불편해 내 딴엔 콧소리를 내며 자기야를 외치며 말을 붙여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퉁명스러운 반응이 전부니 민망하여 그 마저 포기하였다.
그런 그 사람이 연애할 때는 한, 두 시간씩 통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 한 미스터리다. 흔히 잡은 물고기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남자들의 심리일까... 아무튼 재미없는 사람과 사는 건 맞다. 말은 없는데 가끔 뱉는 말들은 주로 잔소리이니-그것도 대개 나를 가르치려는 훈육조의 말-남편은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꼰대임엔 분명하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나이차 6살 차이가 뭐라고 기본적인 상식선의 예의도 입 아프게 가르치려 드니 저절로 "자기야, 내가 애인줄 알아요?" 하고 볼멘소리를 하게 만드는 영락없는 잔소리쟁이이다.
그렇다고 재혼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기대가 낮으면 실망할 일도 적거니와 이쯤 살아보니 결혼할 때는 두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살피고 결혼 후에는 한 눈을 질끈 감고 살아가는 게 참으로 현명한 가정생활을 유지하는데 힘이 된다는 진리의 말씀을 가슴에 깊게 새겼으니-그가 가끔 꼰대 같은 라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을 들을 땐 입으론 "네"하면서 속으론 애국가를 열창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꼰대임엔 분명한 남편이지만... 자칭 쿨하고 열린 마인드인 내게 버거운 상대임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몇몇의 장점은 있으니 상황이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배우자에 대한 조건이 거의 불가능한, 환상의 조건들을 꼽는 2,30대도 아니고 50 대도 후반으로 치달아 보니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존중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상대를 존중하고 섬겨야 된다는 일종의 믿음이다.
내가 이 남자와 재혼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정직함과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이 넘치는(나의 암병력도,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도,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선택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였기에 가능한 결혼이었다.
오늘도 칼질을 하다 손을 베였다. 몇 달 새 크고 작은 상처가 세 번이나 조리 중 생겼다. 다친 아픔보다 남편이 알면 조심성 없다고 혼날 것을 알기에 아픔보다 걱정이 앞선다. 그럴 땐 속으로 잔소리쟁이 영감이라고 되네이며 완전 범죄를 꿈꾼다.
내가 몸살이 나거나 무릎이 다쳤을 때는 유난 맞게 걱정을 하다가도 부주의로 다친 경우는 아이를 혼내듯 태도가 급변한다.
가파른 계단 앞에 섰다. "밑에 계단이니 옆에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내려와." "천천히... 넘어져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자긴 골다공증 있으니 특히 조심해야 돼... " 또 시작이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는데 작은 손가방까지 낚아채 들어준다.
지인들은 나를 볼 때마다 묻는다. "깨가 쏟아지냐고, 남편이 얼마냐 좋냐고 그리고 얼마나 잘해주냐고 하면서 마지막엔 신혼생활은 재미있지? " 하고 어찌들 레퍼토리가 똑같은지... 그럼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설렘에 심장병 걸릴 위험은 전혀 없지만 편안해.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내가 아플 때 기도해 주고 가끔 맛있는 음식 사다 툭 내밀고, 짐은 무조건 뺏어 다 들어주는 사람. 오래된 부부처럼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편안해. " 그리고 겸연쩍게 웃는다.
나의 계절은 가을이 아닐까? 가을에 맞는 삶을 살고 가을에 어울리는 가을 사랑을 하며 그렇게 늙어가겠지...
사람 일은 참 모르는 일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 가득한 꼰대와 재혼을 할 수 있다고 상상조차 안 했는데 참 이상하다. 그런 남편이 싫지 않고 귀엽고 어떤 때는 사랑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니 콩깍지가 나도 모르게 씌워졌나 보다. 호호
기적은 갑자기 이뤄지는 게 아니라 노력해서 만드는 건 아닐까... 꼰대라도 좋다. 자기야 부디 건강하세요. 뱃살 좀 빼시고요~~
어느새 동이 텄다. 값진 하루가 오늘도 내게 찾아왔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까? 물컹한 뜨거운 느낌이 내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