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부산하다. 남편 조카 결혼식으로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 어제도 남편 지인 결혼식 다녀오고... 휴~ 남편이 어디든 함께 끌고 가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사실 좀 피곤하다. 집안 선산 이장과 벌초도 내가 꼭 같이 가야 한다고 따라갔더니 장정들만 열댓 명 모여있고 여자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그림자도 안보였으니 내가 얼마나 불편한 자리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을까...
몸이 약한 편인 내가 두루두루 경조사에 따라다니고, 교회 남편이 속한 부서에 봉사하려니 피곤을 달고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약속 시간도 최소 30분 전에 도착하는 남편이니 새벽예배를 드리러 갈 때는 몇 시간 자지 못하고 일어나 서둘러야 한다.
오늘도 새벽에 깨서 나름 서둘러 준비하는데 미리 준비하고 소파에 앉아 채근을 한다. 시간도 넉넉한데 괜히 마음만 분주하게 만드니 속으로 영감탱이 소리가 저절로 난다. 솔직히 고백하면 남편이 못마땅할 때는 속으로 영감이라고 되뇌면 속이 좀 풀린다. 가부장적이고 꼼꼼하고 나를 수행비서로 여기는 남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복수이다.
젊었을 땐 지금의 지인들은 설마 하고 도통 믿으려 하지 않지만 나도 꽤 한 성질 했다. 욱하고 불의를 보면 달려가 상대가 누가 되던 목소리 높여 싸우고 보았는데... 얼마 전 동생이 내게 언니도 기가 많이 죽었어. 하며 내 젊은 날을 기억해 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보기엔 형부가 갑이고 내가 을과 같은 주종의 관계처럼 보이나 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래 맞아. 이기면 뭐 하냐 그냥 맞춰주면 되지... 하고 깔깔 웃으며 동생의 걱정을 일축했다.
남편이 오죽하면 순종적인 내가 좋다 하니 요즘 세태에 여성들의 공공의 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주도권 싸움이니 쓸데없이 작은 일로 다툼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살면서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작은 일에 감정을 상하는 소모전을 만들기에는 충분히 혼자 살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할까...
만약 내가 이런 우리의 결혼 생활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당연히 개선하려 노력하겠지만 당사자인 내가 남편을 아직은 봐줄 만하니 비교적 궁합이 맞는 편 같다.
초혼이 너무 힘들었고 오래 기간 몸과 마음이 아프면서 힘든 날을 보냈으니 작은 것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 것도 있고 재혼 한 선배 지인이 내게 해준 조언도 깊이 공감했기에 가능하다. 선배 왈 목숨이나 건강이 달린 큰 문제들 아니면 사소한 것들은 양보하는 것이 견고한 가정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부산행 ktx를 타기 위해 행신역에 도착했다. 막내 도련님과 우리 부부 셋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중간 약속 장소, 행신역 역사에서 만났다. 결혼한 장점을 꼽으라면 한 손에 꼽히는 부분이 '형수님' 소리를 들어보는 것이다. 특히 막내 도련님(오십 초반인데 아직 싱글이다.)이 제일 깍듯하고 다정다감하게 항상 나를 챙긴다. 오늘도 내가 젤 좋아하는 커피를 사들고 내게 내민다. 건강상 이유로 내가 커피를 마시는 것을 남편은 싫어하기에 표정이 별로 안 좋지만 모닝커피, 하루를 깨우는 신호탄이다. 남편보다 도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열차에 올라탔다.
부산, 몇 년 전 혼자 1박 2일로 갔던 내가 좋아하는 도시. 오늘은 아쉽게도 결혼식만 참석하고 오후에 서울 오는 차편으로 올라오지만 다음엔 여유 있게 남편과 푸르고 광활한 바다를 물리도록 바라보고 싶다.
상업적인 화려한 웨딩홀에 예비부부들이 화려하게 이름 붙여진 공장 같은 각 호실에서 시간별로 쏟아져 나온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아주 잠시 옛 기억에 젖는다. 어제도 결혼식 참석을 했고 오늘도 참석을 해보니 요즘 결혼 트렌드가 보인다. 잘 모르는 주례자보다는 당사자의 다짐을 나누고 부모님이 들려주시는 덕담을 들으며 새로운 출발을 하는 요즘 세대들이 참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여겨진다.
남편은 집안의 결혼식 때마다 일가친척들에게 나를 소개하기 바쁘다. 지난번 뵌 고모님이 낯이 익어 얼른 달려가 안아드린다. 질부라는 다정한 호칭이 내 마음을 훈훈하게 만든다.
남편은 형제, 가족을 참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조금 일찍 만났다면 우리는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내 가족만 생각하는 내가 일일이 대가족을 챙기는 것은 예전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가 아닌 '우리'가 소중하다고 생각될 무렵 남편을 만났으니 재혼이 가능했던 것 같다.
딸들이 생기고 아들도 하나 추가요~ 줄줄이 시동생들이 나를 형수라 챙겨주니 외롭디 외롭게 있다 -꿈인가 싶게 북적대는 호강을 누리는 지금의 내가, 이 상황이 참 감사하다.
아, 이 영감탱이가 기차 출발 시간 20분 밖에 안 남았다고 화장실 가려는 나를 채근한다. 열차 안에서 해결하라고... 나참 눈을 곱게 흘기고선 "알았어요 "하고 남편 손을 잡고 뛰어간다. 도련님이 뒤에서 아직 시간 여유 있다고 "형수님, 천천히 가세요. 무릎 아파요." 하며 급히 뒤따라온다. 쥐고 있는 남편 손이 참 따뜻하다. 금세 마음이 뜨거워진다. 눈에 맺힌 물기를 혹시 들킬까 봐 성큼성큼 따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