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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자무 Mar 13. 2021

베를린01_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말할수있나요

Berlin, DE_My happiest moment



"너와 함께 지낸 이 한달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어."


뉴질랜드에서 만난 이 뉴질랜드인 남자친구는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초반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감동은 있었지만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순위를 매겨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할 수가 있다고? 전 여자친구와 14년을 만났다고 했으면서, 그 시간들보다 행복한 순간이라고..? 영어권 사람들은 ‘The best OO  in the world’등의 말도 안되는 과장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도 또한 과장을 한 것인지, 궁금한 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나는 의문들을 따지듯이 쏟아냈다. 물론 특별한 시기이긴 했다. 말하기엔 너무 긴 꼬인 사연으로 인해 나는 친구로서 사이가 틀어졌던 그와 그의 좁은 원룸같은 방 안에서 지내게 되었고, 연인이 되었고, 내가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가기 전까지 한 달동안 정말 24시간 붙어있으며 모든 것을 함께 했다. 그 기간은 어찌나 행복하기에 바빴는지 일기 조차도 없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OO했던 순간 같은 것은 평소에 생각하고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선뜻 나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나의 의문들을 듣고 그는 과장이 아니라며, 왜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지 이유들을 늘어놓았다. 착한 거짓말조차 잘 못하는 나는 그래도 “나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고 “고맙다”고 답했다. 나는 그 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실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행복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한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달을 내내 붙어 있다가, 내가 연인이 되기 전 혼자 결정했던 스페인여행을 떠나게 되어 출발 전 날 해준 말이었다. 그리고 여행을 별로 안좋아한다던 그는 내가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가 있을 때 서프라이즈라며 뉴질랜드에서 날아와 여행에 합류했다. 함께 유럽여행을 즐기고 뉴질랜드로 돌아와 우리는 그의 가족들이 있는 영국을 거쳐 베를린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영국인이어서 부럽게도 영국 여권 또한 있는 그는 원한다면 특별한 비자조건 없이 살 수 있는 곳이 많았다. (나는 임시비자를 받아야했다.) 그렇게 40년 가까이를 살았던 고향 뉴질랜드를 떠나 그는 정말 짐을 모두 정리하고 수트케이스 하나, 백팩하나, 기타케이스 하나만을 챙겨 유럽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베를린에서 일년 정도를 함께 살다 이별을 했다. 그리고 나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이제는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그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우리 연애의 초기에 있었지만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우리의 이별이 다가올 무렵에 있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마치 이별을 엄청나게 원해왔다가 해방을 얻은 사람같이 들리겠지만 전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지만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제는 각자의 갈 길을 가야할 시기인 것 같다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이해가 되는 이유로 헤어졌다. 나의 임시 비자 만료가 다가오던 무렵이라 다음 스텝을 결정하던 시기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서로를 남기지도 떠나지도 않기 위해 같은 날 다른 나라로 떠나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다툼이 있거나 서로가 싫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음에도 이별의 날이 다가올 때까지 불쑥 둘 중 하나가 울음을 터뜨리면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거지?"하며 서로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비행기표를 사고 우리에게는 2주라는 기한이 있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장을 보러 가는 김에 우리가 마셨던 물의 빈페트병을 환급자판기에 넣으려고 모으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한 페트병 입구에 입술을 대고 후후 바람을 불며 페트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또 재밌어 보인다며 그를 따라했다. 그렇게 함께 페트병나발을 열심히 불면서 즐거워하며 깔깔 웃고 있던 나는 한순간에 눈물이 터졌다. 매일같이 해오던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함께 할 수 있는 순간이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언제나처럼 내가 울자마자 함께 울었고 우리는 웃다가 울면서 병나발을 부는 기괴한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는 늘 내가 뒤늦게 깨달은 것들에 대해 '그래, 거봐, 알겠지.'하고 뒤늦게라도 알아준 것에 대해서 늘 아름다운 순간이라 여기며 고마워해주곤 했는데, 그날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확신이 이런거구나'하는 깨달음에 그렇게 해주었다. 이렇게 인간 두 명이 바보같은 짓을 함께 하면서 재미를 느끼고 동시에 그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임을 인정하는 순간,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의미했을 때 상대방이 진정으로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깨닫는 순간의 아름다움은 감당할 수 없이 행복했고 슬펐다. 그 순간을 추억할 것임을 당시에도 느낄 수 있었다. 햇살에 드러난 바닥의 먼지, 촉촉한 그의 속눈썹의 이미지를 단단히 고정해서 담아두었다.


그때 부터인 것 같다. 아름다운 순간에 웃다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는 버릇이 생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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