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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우진 Aug 11. 2021

우중휴가

29cm | 위클리 에세이 | 차우진의 <일과 마음의 사운드>

올해 첫 휴가였다. 일은 많았지만 큰 맘 먹고 몇 달 전에 숙소를 예약하고 달력에 표시를 해뒀다. 디데이가 가까워오면서 날도 무더워졌다. 오케이, 반 나절은 일을 좀 하고 나머지는 제대로 쉴 수 있겠어. 가방을 챙기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휴가 첫 날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은 비가 오다말다 했지만 남쪽은 일주일 내내 비 소식이 있었다. 천재지변이지만 휴가는 휴가였다. 사실은 예약한 숙소를 취소할 수는 없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자마자 폭우가 쏟아졌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트렁크에는 쨍한 햇살 아래 바다를 보면서 와인이나 마시려고 준비해 둔 캠핑 의자며, 휴대용 와인잔이며, 턴테이블이 있었지만 일단 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해보면 마음 편히 휴가를 떠난 적이 없었다. 프리랜서의 삶을 사는 내내 그랬다. 혹자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라고 부르고 싶을 지도 모르지만,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사실은 어딜 가든 노트북과 충전기를 챙기는 삶이었다. 자동차를 타도, 기차를 타도, 비행기를 타도, 심지어 현해탄을 건너든 태평양을 건너든 마찬가지였다. 휴가지에 가서 일을 한다는 건 특별한 게 아니었다. 순서가 바뀌었다. 일을 떠나서 며칠 쉬는 게 아니라, 집을 떠나서도 며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일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일과 삶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란 성공을 위한 계단이라고도 한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것이라고도 했다. 나로서는, 그저 해야할 일을 해내는 쪽에 가깝다. 하기로 한 일이므로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휴가여도 마찬가지다. 불합리하고 불쌍해보일지 모르지만, 솔직히 나는 여행지, 관광지, 호텔에서 일하는 걸 좋아한다. 어차피 해야할 일이기도 하고 남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숙소에 도착한 뒤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일기예보를 보니 그야말로 24시간 내내 일주일 간 비가 내린다고 한다. 아 몰라, 이왕에 왔으니 거실과 발코니에 가져온 짐을 풀어둔다. 맥주를 준비하고, 와인잔을 꺼내고, 턴테이블에 바이닐을 건다.   



배경음악은 [Whispers: Lounge Originals]. 6~70년대 온갖 휴양지에서 흐를 법한 음악을 모은 앨범이다. 고급진 라운지에 흐를 법한 음악들이 성냥갑 같은 디자인의 커버에 담겼다. 옛날에는 호텔이든 레스토랑이든 카페든 자체 제작한 성냥갑이 있었다. 지금처럼 전국구가 금연인 세상에 호텔 라운지에서 피우는 담배란 어느 정도는 낭만적으로도 여겨진다. 오래 전의 낭만적인 모멘트를 떠올리며 턴테이블에 자원과 시간과 자본이 넉넉했던 20세기의 배경음악을 올려두고 맥북을 켠다. 냉장고에서 맥주도 한 캔 꺼내고, 휴대용 포토 프린터로 전날 스마트폰으로 찍은 노을 사진도 출력하면서 한껏 휴가 기분을 낸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계속 내린다. 발코니에 있는 풀에는 빗방울이 떨어진다. 계획대로라면 이 시간 해변에 있었어야 할 캠핑 의자는 발코니 창가에 놓아두고, 맥주를 와인잔에 따라서는 그 위에 걸터 앉아 비내리는 창 밖을 본다. 수평선 너머로 비구름이 몰려 온다. 뭐 어때, 그래도 휴가는 휴가 호텔은 호텔 맥주는 맥주니까.


다시, 일이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고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일을 한다. 잘 쉬려고 일을 하고 돈을 번다. 때로는 배낭을 메고 낯선 도시를 걷기도 하고, 때로는 와이파이도 없는 시골집에서 해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이 드는 하루를 보내려고 일을 한다. 잘 먹고 잘 놀려고 일을 한다. 

사실은 나도 그렇다. 휴가지에서 일하는 걸 좋아할 리가… 다음 휴가에는 반드시 미리 일을 다 처리하고 와야지. 다음 휴가에는 반드시 일기예보를 챙겨 보고 와야지. 다음 휴가에는 반드시, 쓸데없이 비싸고 호화롭고 거창한 호텔에 가야지. 가성비 따위 신경쓰지 말고 흥청망청 벌어놓은 돈을 탕진해야지. 휴가란 한 번 쯤은 그렇게 보내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번 휴가는 빗속에서 보내기로 한다. 이 또한 잊지 못할 시간이 될테니 호텔 방 사진이나 잔뜩 찍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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