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9a) 칭다오에서 둔황까지- 중국 횡단여행 (39)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햇빛이 나오기 시작한다. 전죽해를 보고 내려오면 바로 팬더해(熊貓海)로 연결된다. 팬더해는 옛날 이 근처에 판다가 서식하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팬더해는 특히 물이 투명하기로 유명하다. 구채구 이곳의 어느 호수 물이 맑고 투명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팬더해는 그 투명도가 뛰어나다고 한다. 바닥에는 많은 나무들이 쓰러져 잠겨 있는데, 그 형태가 너무나 선명하다.
그런데 또 하나 의문이 떠오른다. 팬더호에 잠겨있는 나무들이 상당히 오래된 것 같은데 어떻게 지금까지 썩어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무가 썩기 위해서는 미생물이 필요하다. 석회질 물이라서 미생물이 살기 어려운가 생각하고 자료를 찾아보았다. 나무를 썩게 만드는 주요 원인은 호기성 미생물인 곰팡이나 막테리아 등인데, 이 미생물은 유기물을 분해하기 위해 산소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구채구의 깊은 호수는 산소량이 거의 희박한 상태이다. 그래서 부패균의 생존과 활동이 어려워 나부의 부패가 극히 늦게 진행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저온 환경과 석회질 물도 부패를 방해하는 요인이라 한다.
팬더호의 푸른 호수는 주변의 설산과 숲을 담고 있다. 자리를 조금 옮겨서 호수를 보면 색은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팬더해의 물이 흘러내리는 곳을 따라가면 팬더호 폭포(熊貓海瀑布)가 나온다.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아주 아름다운 폭포이다. 이 폭포는 특히 겨울에 얼어붙었을 때 그 모습이 최고라고 한다.
1990년대 초반에 발간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란마 1/2>이라는 일본만화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오토메 란마(早乙女亂馬)란 소년이 아버지 겐마(玄馬)와 함께 중국의 주천향(呪泉鄕)이라는 곳으로 무도 수련을 떠난다. 주천향에는 억울하게 빠져 죽은 사람과 동물의 원한이 서린 수백 개의 샘이 있다.
란마는 무술 수련 중 처녀가 익사했다는 낭익천(娘溺泉)에 빠져, 이후엔 찬물을 덮어쓰면 여자로 변하고 더운물을 맞으면 다시 남자로 돌아온다. 겐마는 웅익천에 빠졌다가 판다로 변한다. 란마의 친구 료가(良牙)는 돈익천(豚溺泉)에 빠져 돼지로, 중국소녀 샴푸는 묘익천에 빠져 고양이로 변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만화의 무대가 되는 주천향이 구채구를 상상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늘 판다해를 보니 그 생각이 떠오른다. 판다해 역시 넓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그런데 구채구와 주천향을 자꾸 연관시키다 보니까 구채구의 모습을 만화 속의 주천향의 모습으로 상상해 왔다. 그러나 실제는 완전히 다르다.
팬더해 다음은 낙일랑폭포(諾日朗瀑布)로서, 구채구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폭포이다. 집사람이 벌써 다리가 아프다며 얼마나 걸어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챗GPT에 물으니 2킬로 정도라고 한다. 버스를 타기로 했다. 낙일랑 폭포는 구채구의 'Y'자형 계곡 중심부, 즉 수정구와 일칙구, 측사와구가 만나는 지점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낙일랑 폭포는 엄청난 크기의 폭포였다. 폭은 거의 300미터에 가깝고 높이는 약 25미터나 되는 크고 웅장한 데다 아름다운 폭포이다. 우리나라의 폭포는 대개 외줄기 폭포이다. 낙일랑 폭포는 넓은 계곡 전체가 잘라 져 폭포가 되었기에 웅장한 모습을 보이며 엄청난 양의 물을 쏟아낸다. 거기다 폭포 벽면의 바위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을 하고 있어 폭포물이 떨어지면서 휘갑기기도, 서로 부딪히고 엉키기도 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만들어낸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다.
2017년 사천성 대지진이 있었을 때 낙일랑 폭포도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침화 절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폭포의 물줄기가 끊겨 그야말로 폭포가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물속의 칼슘 성분이 다시 침전되어 무너진 부분을 자연적으로 치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공적인 복구 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어 폭포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자연의 위대한 회복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다음엔 어디로 갈까 다시 챗GPT에게 물으려 하는데, 좀 전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의 뒷부분이 보인다.
"낙일랑폭포까지는 2길로미터이긴 하지만 구채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입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럴 수가! 다시 올라가서 걸어 내려와야겠다. 버스 정류장으로 갔지만, 하행 정거장은 있어도 상행 정거장은 없다. 어쩔 수 없이 구채구 최고의 구간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노룡폭포를 지나 경치를 감상하면서 내려온다 거의 몇백 미터 간격으로 호수와 샘, 그리고 폭포가 나타난다. 이런 광경이 계속되다 보니까 지나온 곳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절경의 연속이란 것.
걷기가 힘들면 버스를 타다가 또 걷고 하면서 공원의 갈림길인 Y자의 중심점에 왔다. 집사람은 더 이상 못 가겠다면서 먼저 내려가겠다고 한다. 집사람은 호텔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나는 관광을 계속하기로 했다. 집사람을 먼저 내려가는 버스에 태워주고 나는 측사와구의 장해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버스는 끝없이 올라간다. 거의 20분 이상을 달린 끝에 버스는 장해(長海)에 도착하였다. 고도를 확인하니 해발 3,100미터, 살아오면서 지금껏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다.
장해(長海)는 이름처럼 아주 넓고 긴 호수이다. 길이는 약 5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이 높은 곳에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호수가 생겼을까? 그리고 구채구 전체가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고산 지대인데 어떻게 이렇게 물이 풍부할 수 있을까? 구채구 계곡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는 4,700미터 정도라 한다. 빗물 외에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린 물, 그리고 석회암 지역의 특수한 물의 순환작용 덕분에 사시사철 물이 풍부하다고 한다.
장해는 수로가 없는 폐쇄호수로서, 호수의 물은 오직 증발과 지하 침투로만 조절된다고 한다. 그래서 호수의 물은 장마철에도 넘치지 않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늘 안정된 수위를 유지한다고 한다. 거대한 장해 호수를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호수 저쪽 끝 멀리 눈 덮인 산의 모습이 까마득이 보인다. 눈 덮인 산봉우리가 호수를 감싸고 있다. 정말 절경이다. 중국에 와서 이틀 전에는 사막을 구경하고, 오늘은 이렇게 풍요한 물의 천국을 경험한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 인공지능에게 물어보고 있는데, 그 순간 갑자기 돌풍이 불어 모자가 벗겨져 날아가 버린다. 날아간 모자는 곧장 울타리 사이로 장해에 떨어져 버린다. 건질 방법이 없다. 지난 5년간 나와 항상 여행을 함께한 모자였다. 전국의 여러 산과 명승지는 물론 동남아, 유럽, 일본, 중국 늘 함께하던 모자였다.
잘 가라, 모자야! 그동안 즐거웠다.
안녕!
벌써 오후 3시가 가까워진다. 장해에서 슬슬 걸어 내려오면서 구경을 하려 했으나 , 워낙 높은 곳이라 그다지 눈에 띄는 경치는 없다. 버스를 타고 잠시 내려오다가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곳에 함께 내렸다. 본격적으로 호수와 샘들이 니타 난다. 오전보다는 크기가 좀 작은 느낌이다, 그러나 우거진 숲과 괴목과 함께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도로 쪽을 보니 거의 몇백 미터 간격으로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경치를 감상하면서 내려가다가 적당한 시간이 되면 버스를 타려고 마음먹고 계속 걸었다. 아름다운 샘이 나타나면 한 바퀴 돌아보고 또 사진도 찍고 하면서 유유자적 내려왔다.
다섯 시 가까이 되었다. 너무 늦을 것 같아 버스를 탔다. 공원 중간의 통과하여 하류 계곡인 수정구로 내려와 적당한 곳에서 차를 내렸다. 느낌상으로는 이제 출구까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구경하면서 출구까지 슬슬 걸어가면 되겠다.
이곳은 하나의 샘, 하나의 폭포를 지나면 금방 다음 명소로 연결된다. 구경을 하면서, 쉬면서 유유자적 걷는다. 그런데 곧 나타날 것 같은 출구가 보일 생각을 않는다. 벌써 6시가 넘었다. 표지판이 보인다, 출구까지 9.5킬로란다.
이런! 너무 늦었다. 버스를 타야겠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그렇게 자주 보이던 버스 정류장이 보이지 않는다. 도로옆 데크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이미 주위는 어두워진다. 관광객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사오십분을 걸었을까, 드디어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겨우 버스를 탔다. 완전히 파김치가 되었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확인해 보니 32,000보. 걸음을 측정한 이래 최고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