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46
스트레이가 겪은 일을 거칠게 요약하면 결국 우울증, 생활고, 중독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의 실패한 자살 시도에 대해 들을 때는 ‘살았다니 다행이네’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평소 교류하던 친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자 한 가지 잔인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목숨을 건지고 나서도, 심지어 중독까지 낫고 나서도, 우울증과 생활고는 계속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우울증, 특히 중증 우울증은 단순히 기분이 우울한 병이 아니다. 인지, 집중력, 기억력, 판단력,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정신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이처럼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며 혼자 생활하던 사람에게는 특히 위험했다. 식사조차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을 때,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을 때,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해로운 결정을 내릴 때, 스트레이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스트레이를 둘러싼 현실은 더 힘들어졌고, 힘들어진 현실은 스트레이를 더 우울하게 했다. 악순환은 점점 더 크고 깊어졌다.
가족이 줄 수 있는 도움에도 한계가 있었다. 스트레이처럼 가족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남동생은 그날 밤 스트레이를 위해 달려오기는 했지만, 스트레이가 죽을 작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동생도 팬데믹으로 실직해서 당장 자신의 삶이 버거운 처지였다. 아마 스트레이가 겉보기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어떻게 해 볼 여지가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스트레이는 이제 죽음이 아닌 방법으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더 이상 우울함을 술로 덮을 수 없었기에 대신 걷기를 선택했다. 무작정 집을 나서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걸었다. 항상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다른 동네들을 걸으면서 이사를 가기에 알맞은 곳일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예전에 출퇴근을 할 때 구했던 집에 계속 살고 있었는데, 번화가에서 가까운 편이었기 때문에 집세가 비쌌다. 그러나 수중에 돈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집세가 더 싼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조차도 실현하기 어려운 계획이었다. 스트레이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로 그저 쫓겨날 때를 준비하며 천천히 짐을 쌌다.
- 다시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렇게 됐네.
스트레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해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학교에 다니다가 노숙을 하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내색한 적이 별로 없지만 스트레이에게 그 시절의 막막함과 무서움은 큰 트라우마였던 것 같다. 이제 너는 수석 개발자 경력과 번듯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프로그래머라고, 아무 기반이 없던 그때와는 다르다고, 그러고 있을 시간에 자잘한 프리랜서 일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몇 번이고 일깨워주려 했다. 그러나 결국은 공허한 말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하는, 위기 상황에서 마음을 다잡고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해 나가는 것도 결국은 기본적인 정신건강이 갖춰져 있어야 가능했다. 스트레이는 그저 하루하루 절망 속에서 눈뜨고, 공황상태 속에서 종일 허우적거리다가, 다음날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상태였다. 기운을 짜내서 겨우 간단한 요리를 했다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고, 몇 분 동안 바닥의 음식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시간만이 냉정하게 흘러갔다.
현실적인 선택지는 단 하나, 어머니와 동생이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들어와서 살라고 먼저 제안했기 때문에 스트레이가 수락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스트레이는 그 선택지를 생각조차 하기 싫어했다. 어머니와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말할 만큼, 어머니에 대한 스트레이의 불신과 미움은 너무나도 뿌리가 깊었다. 죽기보다도 싫은 일을 참고 해내는 데에는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스트레이에게는 그 에너지가 없었다.
행운과 불운은 모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행운은 인터넷 방송에서 생긴 친구들 중 몇 명이 기꺼이 스트레이를 도운 것이다. 두세 달 정도 집세와 생활비를 보내 준 친구도 있었다. 음식이 떨어졌을 때는 몇 주치의 식료품을, 사랑니가 부어서 고생했을 때는 약과 아이스바를 배달시켜 준 친구도 있었다. 온라인에서 친한 사이라고는 해도 실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기에는 놀랍도록 큰 선의였다.
불운은 팬데믹이 계속되면서 일리노이 주의 공공복지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었다. 식비 지원을 포함해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들이 있었지만, 신청을 해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한 번은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옛날처럼 피자 체인점 리틀 시저스의 쓰레기통을 뒤져 피자를 주워다 먹은 적도 있었다.
그 중 스트레이에게 금전적으로 가장 큰 타격은 집세 지원을 받지 못한 일이었다. 팬데믹 때문에 집세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3개월 치의 집세를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스트레이와 똑같은 공동주택의 다른 세입자는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스트레이가 신청했을 때는 지원을 받지 못했다. 단순히 재정 문제로 지원이 중단된 것인지, 아니면 집주인의 부정행위 때문에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인지 내막은 알 방법이 없다. 세입자가 직접 신청할 수는 없고 집주인을 거쳐 신청해야만 하는데, 집주인이 돈을 더 받아내기 위해 서류에 집세를 실제보다 훨씬 높게 적어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가장 큰 타격은 실업급여 지급을 거부당한 일이었다. 스트레이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애썼다. 실직 초기에 인터넷 방송으로 몇 달 간 벌었던 돈도 정산 받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산을 받으면 소득으로 간주되어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업급여는 아주 적은 금액이 단 한 번 지급되었을 뿐이고 그 뒤로는 완전히 끊겨 버리고 말았다. 스트레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정산을 받고,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방송도 다시 시작했다. 바로 그때 실업급여 부서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는 소득이 발생했으니 실업급여를 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실업급여 지급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신청자들이 더 기다리지 못하고 적은 돈이라도 벌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실업급여를 매달 받았다고 해도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세와 생활비를 모두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그러나 실업급여를 거부당한 일은 스트레이의 실낱같은 희망마저 끊어놓은 듯 보였다. 자포자기한 스트레이는 은행 계좌에 돈이 없는데 집세를 수표로 써서 내는 무모한 일을 저질렀다.
- 아무 생각이 없었어. 그냥 어쩔 줄 몰랐어. 그게 제일 큰 문제야.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친구들이 물었을 때 스트레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실직 후 약 1년간의 생활을 요약한 세 문장이었다.
친구 한 명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며 그 돈을 메워 주었다. 이제는 정말로 어머니의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달의 마지막 밤, 마침내 스트레이는 이사를 했다. 동생의 도움을 받아서 부피가 큰 짐은 창고로, 당장 필요한 물건은 어머니의 집으로 옮겼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지만 이사는 큰 탈 없이 끝났다. 자러 가기 전 샤워를 하면서 스트레이는 오랫동안 울었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