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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니엘 Dec 02. 2024

육아휴직, 내 꾀에 내가 넘어갔네

다이내믹 회사 이야기


내가 회사를 10년간 다닐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대되는 미래'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육아휴직".



결혼을 안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고, 아이가 없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나는-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육아를 위해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들려오는 맞벌이의 고충을 알았기에, 일에서의 만족감보다 가정의 따스함을 추구했던 나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위해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입사할 때 육아를 생각하며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막상 다녀보니 좋은 복지가 가득했다. 단축 근무 및 급여 보전, 조산기 있을 시 유급 휴직, 출산 휴가와 별개로 주어지는 출산 휴직에 난임 지원까지. 그리고 '정책이 잘 받쳐줘도 실제 맘 편히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는가?'가 정말 중요한데, 우린 남직원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만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물론 승진은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육아 휴직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잠시 회사를 멈추고 개인의 삶에서 귀한 '가정'이라는 가치관을 선택하는 것일 테니까.



'그러면 소는 누가 키워!' 산업화 시대에 아등바등 회사의 부품으로 살아오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이젠 개개인의 삶을 배려해야만 선순환이 될 것이다. 다닐만한 회사가 되어야 직원들도 애사심을 가지고 다니지. 나같이 이런 복지에 혹해서 남아 일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다.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대기업이니 가능했을 것이다. 소규모의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고민이 남지만, 내 수준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국가적 차원의 담론이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육아휴직을 쓸 줄 알았다. 물론 10년을 다니며 업무도 재밌고 하루하루도 버틸만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내게 결혼과 육아는 멀어져만 갔다. 내 힘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미래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능성이 적어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직원이 더 나은 일자리를 위해 떠났다. 육아휴직과 같은 복지보다는 당장의 월급과 성장이 더 중요하던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이직이나 사업 등으로 떠나갔다. 30대 초중반의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다. 능력이냐 가정이냐.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코로나 시기를 4년이라고 한다면 나는 30대 초중반이었는데, 그 시기는 딱 내 주변 또래가 결혼과 육아를 시작하던 시기와 맞닿아 있었다. 그 시기를 잘 활용하여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던 많은 동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코로나 및 육아휴직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돌아온 동기들. 삶의 변화가 생기며 인생이 무르익어 갔다. 동시에 회사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코로나로 신규 채용은 줄었고, 자연스럽게 직원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회사가 된 것이었다. 회사와 우리나라의 중위 연령 46.1세(통계청 24년 자료)가 얼추 비슷하니 대한민국 평균 회사라 해도 맞을 것이다.



자, 이제 더 이상 2030의 젊은 혈기는 사라지고 가정을 위해 안정성 및 자리 보존이 필요한 사람들이 주류가 되었다. 30대 중반인 나는 우습게도 여전히 막내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이 가진 기혼자들이 가득한 회사 속 미혼 비주류가 된 것이다. 이제 어떤 일이 생기는가? 어영부영 주류를 위해 희생당하는 일이 많아졌다. 조용히 순응하는 편인 나도 못 참을 만큼...



주말 출근이 생길 때, "아이가 주말에 혼자 있어서 쉬어야 해요." vs "저도 결혼하고 싶어서 사람을 만나야 하니 주말이 필요해요." 그러면 누구라도 전자가 우선시될 것이다. 아이가 혼자 있다는데 어떡하는가. 아이를 향한 배려도 그게 일상이 되어 내게 끊임없이 암묵적 강요가 되었다. 마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될달까.  



평일 퇴근이라면, "아이 유치원이 있어서 반반차 써도 될까요?" vs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반반차 써도 될까요?" 우습게도 후자는 말도 안 되는 핑곗거리가 될 것이다. "일이 생겨서 반반차 써도 될까요?" 정도로 포장해서 갈음하겠지. 앞은 정당한 사유, 뒤는 하찮은 사유가 된다. 사회적 약자(어린이)를 위해서 희생하는 엄마는 고귀하니까. 미혼의 일상은 기혼의 일상에 비하면 하찮아진다. "야,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 너 보고 싶다면 시간을 빼서라도 올걸?" 핀잔이라도 안 들으면 다행이겠다.



누가 약자인가. 다수의 소수를 향한 폭력으로 느껴졌다. 배려와 희생은 쌍방이어야 한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관계는 좋은 관계가 아니다. 과거엔 나 또한 언젠가는 가정이 생길 테니 이해하고 인정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타인의 꿈과 가정을 위해 발판이 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더 속상하고 반발심이 생겼다. 특히나 그 과정이 소통을 통한 상호 배려가 아닌 일방적인 강요라면 더욱 답답해진다.





같은 일개미들끼리 다투고 싶지는 않다. 한정된 자리를 두고 노예들끼리 다퉈봤자 서로 의만 상할 것이다. 사람의 이기심은 본능적인 부분이고, 내가 여유가 생겨야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거니까. 다만 문제가 생기면 사람을 바꾸기보다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을 고민하는 내 성향상 이 사회 현상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된다.



독일에서 일을 하며 가정 위주로 돌아가던 문화를 경험했던 나는 이럴 때마다 문득문득 해외가 그리워진다. 마트도 저녁 8시면 문을 닫고, 주말에는 문을 여는 음식점이 없어 미리 음식을 사놔야 했으며, 설날 크리스마스와 같은 공휴일에는 관광지도 문을 닫았다. 경쟁이 먼저고, 편의가 먼저고, 돈이 먼저인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우리가 조금씩 양보하며 불편함을 감수할 때 타인의 배려가 되곤 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결혼하래?", "누가 주말에 일하는 회사 가래?", "아쉬우면 승진하던가.", "육아휴직 누가 쓰지 말래?" 등등의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비난하는 문화 속에서 좌절을 맛본다.



영화 <위키드>에서 의미 깊게 본 장면이 있다. 인간 만이 우월하다며 말을 할 수 있는 동물들을 죽이는데, 말(언어)을 빼앗기는 것은 곧 발언권을 빼앗기는 것이며 정체성을 빼앗긴다는 의미이다. 저항하다가 점차 지쳐간다. "실망이 반복되어 희망을 잃으면 모두가 침묵하게 된다." 약자에게서 말을 빼앗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회에서 소시민은 길을 잃는다.



자꾸만 주말 출근하게 되는 내 푸념 속에서, 소통이 안 되는 회사 생활 속 답답함을 토로해 본다. 육아휴직 한번 써보려고 살았다가 남 좋은 일만 하는 듯하다. ㅋㅋㅋ 가지려는 욕심인지, 나은 세상을 위한 바람인지 어렵다만, 육아휴직 제도는 마치 계륵처럼, 따먹을 수 없는 신 포도처럼 내게 남아버렸다. 아무리 좋은 제도면 뭐해, 내가 못쓰는데. ㅋㅋㅋ 눈에 훤히 보이는데 못 먹으니 더 아깝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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