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국 여행기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업무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떠나야겠다‘라는 마음을 먹었던 지난해 11월, 여름에 못 간 여름휴가를 다녀오겠다고 회사에 통보했다. 하루 만에 왕복 비행기표와 3일 정도의 숙소만 예약만 한 채, 혼자 영국 런던으로 떠났다.
15일 동안 런던, 맨체스터, 옥스퍼드, 체스터, 콘위 등 잉글랜드와 웨일스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동행자 없이 현지 투어에서, 식당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15일을 보냈다. 그 2주간의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작 반나절 조금 넘게 있었던 해변 도시 브라이튼과 세븐 시스터즈라고 말할 것이다.
런던에 도착한 날, 한인 여행사를 통해 이틀 후 런던 근교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는 버스 투어를 예약했다. 이왕 영국에 온 김에 될 수 있으면 많이 돌아다녀 보자는 생각이었고,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모른 채 그날 새벽녘에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아직 시차 적응을 못 해서인지, 잠자리가 변해서인지, 밤새 잠을 못 잔 탓에, 버스를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어렴풋이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깥 풍경 절대 보지 마세요!“
5분여가 지났을까. “이제 바깥을 보셔도 됩니다!” 하는 소리에 나도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절경이 펼쳐졌다. 새하얗게 드러난 절벽 위에 광활한 초록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그 웅장한 절벽은 반짝이는 터키석의 바다를 자랑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영화 <어톤먼트>에서 보던 세븐 시스터즈였다.
세븐 시스터즈, 마치 7공주를 연상시키는 이 이름은, 구불구불한 절벽의 7개의 능선의 모습이 마치 일곱 명의 수녀님이 서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대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분필처럼 지대가 약해 바닷바람과 바닷물에 부딪히면서 계속해서 부서지는 중이라고 했다. 숨이 턱턱 차오르고, 매서운 칼바람에 언덕을 올라가기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곧 눈 앞에 광활한 전경이 펼쳐졌다. 무한해 보이는 지평선과 푸른 초원과 흰색 절벽, 그리고 푸르른 바다가 기억에 영원히 새겨질 숨 막히는 광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이곳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소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한국에서부터 내 안에 고이 모셔온 답답함이라는 마음이 단숨에 떠나간 느낌이었다.
이 멋진 절경을 뒤로하고 간 곳은 브라이튼이었다. 이 런던 남부의 해안 도시는 18세기 중반부터 휴양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도시다. 영국왕 조지 4세도 이 도시에 반해 로열 파빌리온이라고 불리는 인도식의 화려한 별궁을 이 곳에 지었다고 한다.
브라이튼에서 처음 마주한 것은 반짝반짝 햇살에 일렁이는 바다의 윤슬이었다. 자갈이 깔리 해변에 발을 딛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고 한참을 서 있었다. 상쾌하면서도 짠 바닷바람과 시원한 파도소리가 참 오랜만이었다.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며 물멍을 때리는 사람들,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 이곳 사람들이 만끽하고 있는 활기참과 여유로움이 꼭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저 멀리 놀이 기구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디선가 나는 피쉬 앤 칩스 냄새를 따라 목적 없이 계속 걸어보았다.
조금 더 북적이는 해안가 안쪽에 다다르니, 좁은 길과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작은 소품 가게와 부티크, 갤러리 그리고 카페들이 즐비했다. 골목에는 역시 해안 도시답게 나의 후각을 자극하는 해산물 식당이 많았다.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아 식당들의 유혹을 뒤로 하고 걷다가, 아기자기한 느낌에 파란 천막의 애프터눈 티 가게를 발견했다. 왠지 관광객보다는 현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가게인 것 같았다. 대여섯 테이블밖에 없는 실내에 2인석에 자리를 잡고, 크림티와 스콘 두 개, 그리고 잼과 클로티드 크림이 제공되는 1인 티 세트를 주문했다. 잼과 크림, 그리고 스콘 모두 가게에서 직접 제조한 것이었다. 런던보다 싸기도 했고, 달곰하니 맛이 좋아서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내 옆 테이블에 자리 잡은 스웨덴 어머니들과 서로 사진도 찍어 주고, 이런저런 여행 이야기들도 나누었다. 40대의 4명의 어머니가 아이들은 뒤로 하고 우정 여행을 왔다고 했다. 우리 나라에서라면 이렇게 옆 테이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텐데…낯선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 그리고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또다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게 여행의 묘미 아닐까?
해가 질 때쯤 바닷가 버스 정류장으로 나오니, 바다가 황금빛으로 반짝반짝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언젠가 다시 와서 여유롭게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마음이 힘들 때마다 종종 브라이튼과 세븐 시스터즈에서 찍은 인생샷을 꺼내보면서 다짐을 한다. 다시 한번 꼭 가보겠노라고. 그 날까지 버텨보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