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카페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코로나19가 심각단계에 이르기 전 밴드와 가수까지 결정된 거라 진행하기로 했단다. 문제는 코로나 심각단계로 음악회에 올 관객이 없다는 거다. 지인이 자리를 채워줬음 해서 가족들과 출동했다.
일을 마무리 못한 상태라 컴퓨터는 켜 두었다. 갔다 와서 또 언제 하나 싶었지만 당장은 머리수 채워주는 게 급하다. 다행히 7시 음악회 시작 직전 도착했다. 우리 가족 4명 포함 8명이다. 안 왔으면 지인이 울뻔했다.
몇 달 전 지인이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고 할 때는 아이들과 공연을 볼 수 있어서 좋겠다 싶어 되도록이면 가겠다고 했다. 막상 가는 날이 되자 일이 쌓이고 남편도 백신 3차를 맞은 상태라 안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럼에도 출동한 것은 인간관계상 간 거다.
방역 차원에서 카페에서 마스크를 쓰고 물 한잔도 마시지 못하는 상태로 공연은 진행되었다. 카페 주인 입장에서도 무르고 싶었을 거다.
음악회는 너무 좋았다. 1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좋아하는 뽀로로 노래는 왜 안 나오냐고 둘째가 칭얼대어 잠깐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1시간 40분 동안 진행된 공연은 나를 울고 웃게 만들었다.
평소엔 노래를 듣는 일이 거의 없다. 아침엔 마음이 급해서, 일할 땐 방해돼서, 아이들이 있을 땐 자기들이 좋아하는 노래나 프로그램을 켜 두기 때문에, 나에게 플레이 리스트라는 건 없다. 노래방 갔던 기억이 까마득하다. 이젠 가라고 해도 못 간다. 아는 노래가 없다.
공연이 끝나갈 때쯤, 처음엔 눈을 감고 조는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어느 순간부터 일어나 사진을 찍고 영상을 촬영하며 캐럴을 불러달라 조르기도 했다. 나도 그 요청이 반가웠다.
뜬금없지만 이렇게 정리해본다. '육아휴직은 음악회다'
음악회 내내 이렇게 정의 내렸다. 음악회가 없어도 인생은 잘 살아진다. 정 노래가 듣고 싶으면 유튜브로 잠깐 감상하면 된다. 지칠 때는 주말이 있어 그런대로 일상을 충전하며 살아가듯 말이다. 음악회에 가기 직전까지 일을 끝내지 못해 컴퓨터를 켜 두었듯 남편이 휴직을 하는 순간까지 나의 일이라는 것들은 끝이 없었다. 음악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육아휴직이 끝나면 12시 1분의 신데렐라로 돌아갈 것이다. 직장맘, 엄마, 며느리, 딸로서 일과 살림, 집안의 대소사, 경제적인 교통정리 등등...
그럼에도 육아휴직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가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다가 등 뒤에 쿠션을 대고 기대면 그제야 불편하게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육아휴직도 마찬가지다. 난 잘 살고 있다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다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고 타이르듯 자신을 다독거렸지만 마음속에는 앙금이 짙게 깔려있었다.
똑같이 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왜 내가 더 많은 시간을 고생하는 건지.
아침저녁 밥그릇과 접시들을 싱크대에 넣었다 뺐다 하는 게 나에겐 적응이 안 되는데 왜 친정 엄마처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화장실 변기를 더럽게 하는 장본인은 따로 있는데 내가 왜 뒷정리까지 해줘야 하는지
남편은 처가에 가면 들어가면서부터 눕는데, 나는 왜 시댁에 가면 일을 안 해도 쭈뼛쭈뼛 서 있기라도 해야 하는 건지
몸살이 나면 남편은 오자마자 씻고 뜨끈한 국물에 밥 말아먹고 눕는데 난 어그적 어그적 밥을 하고 차려줘야 하는지.
퇴근 후 아이들과 밥을 같이 먹는 걸로 최고의 아빠, 멋진 남편이 되지만 고작 퇴근 후 2시간 가족들과 함께할 뿐인데 왜 남편에게만 양보다 질로 인정받는 건지.
나는 왜? 왜~~~~~???
힘들어도 나름 요리를 즐기고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고 느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정해져 버린 역할과 불평등함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내가 좀 더 하면 어때!', '얼마나 힘들다고!' ' 시간 되는 사람이 먼저 하면 빨리 쉬고 좋지!' 했던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어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로 변하는 시간이 12년이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이 여자랑 사는 남자는 참 힘들겠다' 생각하신다면 딱 2주일만 아침저녁밥과 아이들 간식을 챙기며 직장생활을 해보시라 눈 똥그랗게 뜨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 이웃집 할머니가 애들 밥 차려줘야 될 텐데 잠깐 왔다 갈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그래서 남편이 아이들 밥 챙겨주니 괜찮다고 했더니 "시상에~ 너무 좋겄네" 하셨다. 그래서 내가 "네. 밥만 안차려도 살 것 같아요" 했더니 할머니는 "밥'만'이 아니야, 밥이 내 인생 전부인데, 밥을 안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난 생각도 못해봤어." 하셨다. 그렇다. 아이들을 먹이고 살림을 하는 것은 반백년이 차이나는 살림 고수에게도 '뚝딱'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남편이 나눠서 해준다는 것은, 경험해 본다는 것은 '가족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유지' 될 수 있는 든든한 기초 다지기가 된다.
'내가 왜?'로 억울했던 것들의 보상차원에서 '남편의 휴직'이 필요한 게 아니다. 직접 살림을 해보는 경험은 '돕는 남편'에서 '함께하는 남편' 이 된다.
아이가 3세 이전 일 때는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 갈아주고 안아주는 게 가장 힘들다. 그래서 모유수유를 하더라도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며 수유를 제외한 돌봄과 가족 식사를 챙기면 된다.
3세 이후엔 먹는 양이 많아지고 식성이 다양해진 가족들에게 맞춤형 음식 제공이 가장 큰 일이다. 특히나 코로나19로 아이들 하교시간과 등교 일정이 들쑥날쑥할 때는 절실하다. 부부가 힘을 합해야 한다.
현실이 쉴 수 없다는 것을, 아내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러지 못해 미안해하는 남편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당장 나부터도 한 달에 2시간 잠깐 외출도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월급에만 의지해선 안된다. 내가 경제 공부를 하는 이유이다.
육아휴직은 인생에서 음악회와 같다. 100세 인생에서 휴직 기간은 찰나에 불과할 지라도 인생이 바뀌기 충분한 시간이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며 말한다. "복직해도 아침은 내가 할게, 그래야 조금은 공평하지" 이 말에 쿠션에 등을 기대고 누운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미소가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