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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여정 Jan 05. 2022

식사 준비라 말하고 요리라 적는다


남편이 직장에서 짐을 싸와 집으로 가져온 다음날은 내가 주방을 떠나고 남편이 주방을 맡게 된 날이다.

다음날 새벽 휑한 눈으로 "애들 밥 먹여서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돼?" 물어보며 주방을 서성이던 남편이 100일이 되지 않아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웍을 다루고 칼질을 한다.


2시간이 넘게 걸리던 호박 된장국은 이제 20분이면 완성이다. 재택근무를 하며 챙겨 먹기보다는 '먹어버려야' 하는 것들로 대충 때우던 나의 점심이 풍성해졌다. 자랑 좀 해보자면 아귀찜, 잡채밥, 봉골레 파스타, 로제 파스타, 칼국수, 겉절이, 솥밥, 각종 찌개 류 등등이다. 내 집에서 손가락 까닥 안 하고 먹는다니 웬 호강인가 싶다.


살이 쪘다. 아이들이 하교 하기까지 공복 상태에 익숙했던 내 위장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식이 들어가니 속 쓰림 증상이 없어졌다. 숟가락까지 놓여있는 '홈 레스토랑'에 다섯 발자국만 내딛으면 되니 살이 안 찔래야 안 찔 수가 없다.

결혼 전 빈궁했던 청년, 지금의 남편은 10년 가까이 자취를 하면서도 국 하나 끊일 줄 모르고 매끼 라면에,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결혼 후 건강식단을 하며 위장병은 말끔히 나았다. 그런데, 10년 넘게 살림을 했더니 내가 위장병에 걸렸다. 이젠 나도 말끔히 나았다. 진부하지만 질병의 원인은 스트레스와 잘못된 식습관이다. 남편의 결혼 전 식습관과 나의 결혼 후 스트레스 문제가 해소되니 건강해짐은 당연하다.


남편은 하루 세끼를 모두 블로그에 올렸다. 처음엔 '오늘도 삼시세끼 했다'로 적더니 어느 순간 들어가 보니 '오늘의 요리'라고 쓰여 있었다.


<삼시 세 끼>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인간은 하루 종일 먹기 위해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먹는 시간은 잠깐이고 재료를 구하고 손질하고 보관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렇다고 세월이 좋아져 쉽게 마트에서 재료를 구하고 장비 빨로 다지기, 채썰기, 만능기로 요리를 하니 "밥 차리는 게 뭐 어렵다고! 난리람" 라며 살림을 우습게 본다면 모르는 소리다.


경제학의 아버지이며 <국부론>을 쓰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애덤스미스를 겨냥하며 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라는 책이 있다.

아무리 과학 발전으로 편리 해졌다지만 먹고사는 것이 '뚝딱' 되지는 않는다. 책 내용을 인용하여 살림을 우습게 보는 분들께 답한다.  '빨래는 세탁기가, 음식은 만능기가 뚝딱 하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씻고 다듬어 넣는 것은 누구인가? 풀떼이죽과 핏물 흐르는 고기를 식감과 웰던으로 바꾸는 것은 수시로 뒤적거림과 숨죽임을 요령 있게 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니 그 시절 주방 살림의 앞뒤만 보고 결혼도 안 하고 평생 어머니에게 밥 차려달라고 한 애덤 스미스는 불효자이다. 주부에게 넘기는 4차 혁명 시대의 남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훅 가는 날이 있을 것이다.'


남편의 블로그를 보며 이제 조금은 동등해졌음을 느꼈다. 직장맘을 대단하다고 칭송하고 밖에서 먹는 건 물도 맛있다고 말한다.

난 살이 찐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괜찮네'라고 할 실력에도 '엄지 척', '훌륭해'를 말해준다. 남편의 밥상 사진을 보면 그릇, 수저가 제각각으로 짝이 맞지 않게 먹었던 모습이 보인다. '내가 그랬구나.' 싶어 반성이 되면서도 플래이팅과 거리가 먼 현실 밥상이 정겹고 고맙다.


세상에 '간단히'와 '대충' 은 없다. 누군가의 수고로움에 대한 결과로 우린 살아간다. 

새벽에 나갔다 밤늦게 퇴근하는 분들에게 평등을 주장하며 주방 살림 분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되고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 밥을 준비하는 게 맞다. 단, 수고로움에 대한 존중, 결과물에 대한 칭찬, 식사 준비 소리가 나면 일어나 수저통이라도 흔들며, 같이 준비하는 센스를 발휘해 달라는 것이다.


우린 역할 바꾸기를 통해 서로의 힘듬과 수고로움을 알게 되었다. "힘들었겠구나" 하며 감미롭게 말해주는 남편은 아니지만 믿어 의심치 않도록 그동안의 노고에 고마웠음을 표현해줬다.


살림은 여자만의 것은 아니다.  나의 이야기에 "우리 집 남자는 할 줄 몰라요"라고 하시는데,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 해본 것이다. 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이 시대에 살림을 하고 가족을 먹이는 모든 분들은 위대하다. 최고의 셰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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