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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여정 Jan 13. 2022

눈치 보는 딸

딸의 가정 방문 수업이 있는 날, 수업 시작 전 딸이 말한다.

“저희 아빠 이제 1년 동안 집에 있어요. '육아휴직'이에요”

선생님께서 묻지 않은 말을 딸이 먼저 한다.

선생님은 "좋겠다. 부럽다" 웃으며 대답하셨다. 반면 딸은 꼭 해야 할 말을 한 것처럼 약간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빠가 낮에 집에 있는 상황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직장을 잃고 기약 없이 쉬는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였는지 '1년'과 '육아' 휴직임을 강조했다.


동네 어른들도 망설이는 말투로 "요즘 애들 아빠가 집에 있던데,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보셨다.

"아니요, 육아휴직으로 놀고 있어요"라고 웃으며 대답했더니

"아이고, 우린 괜한 걱정을 했구먼. 그럼 몇 개월 있다 출근하겠네" 하시면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남편의 휴직이 누군가에겐 불편했나 보다.

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어느새 눈치를 보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건 돈을 번다는 것과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아빠는 출근하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나 보다. 둘째는 놀아주는 것이 마냥 좋아서 아빠가 약속이 생긴 날에는 울면서 찾기도 했다. 하지만 첫째는 언제든 아빠가 출근하길 바랬다.


내가 딸의 나이 때, 아빠는 종일 집에 누워 TV를 보셨다. 아빠 나름대로 힘든 시기였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힘들었다. 아빠가 집에 계시고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안 계신 것처럼 이야기했었다.

친정 아빠가 집에서 종일 계시는 기간은 기약 없이 연장되었고 엄마가 경제적 책임을 졌다. 엄마가 일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자랑스러웠지만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럼 아빠는 뭐하셔?"라고 물어볼까 봐 엄마 이야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


30년이 흘렀다. 아니, 동네 할머니들의 세대부터 60년이 흘렀다.

"요즘 세상에 남자 여자가 어딨어? 능력 되는 사람이 돈 벌고 일하면 되지"라고 말하는데, 요즘 아이인 딸에게는 아직 아닌가 보다.


가만! 생각해보니 아이를 자연에서 뛰어놀게 키우기 위해 이곳저곳 시골을 다니며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 귀촌하여 주말부부로 지내며 아이를 책임지는 건 엄마들이었다. 맞벌이 부부가 타인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100일 된 아기 때부터 어린이집 종일반을 시작으로 돌봄이 필요한 나이까지는 여러 군데 학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주말에도 종일 컴퓨터와 핸드폰 게임을 하는 건 알지만 일하느라 통제할 수 없다. 이런 한계에 부딪혀 귀촌 또는 농촌유학센터에서 대안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대안을 찾아도 두 집 살림을 하는 건 거의 엄마들이었다.


돈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집에 빨간딱지가 붙어본 경험이 있다. 살면서 가장 아플 때였는데, 돈이 없어 더 아팠고 치료할 수 없었다. 진부하지만 건강만큼 돈도 필요하다.

그런데, 돈은 남자가 벌어야 할까? 맞벌이를 통해 경제적 수준이 올라가고 삶의 질이 높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경제적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아빠가 엄마보다 수입이 좋은 것은 아닐 터, 그럼에도 책임은 져야만 하는 걸까? 오히려 '아빠는 일을 해야 한다' 고정관념이 아빠들 스스로를 압박하고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진 않을까? 그보다 중요한 건 '삶의 태도' 아닐까?


30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현관 앞 아빠의 깊숙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엄마가 새벽에 해놓고 가신 밥과 간식을 먹는다. "같이 먹을까?"라는 말도 목구멍에서 나오다 만다. 소파에 뒤집어 벗어놓은 아빠의 양말이 보인다.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이 말라비틀어져 있다. 조용히 방에 들어간다.


30년 후,

유치원과 학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팔 벌려 아빠가 맞아준다. 집에 돌아와 아빠가 해준 간식과 밥을 먹는다. 떨어져 있는 동안 있었던 일들은 조잘조잘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없는 동안 설거지, 청소와 빨래는 다 되어있다. 이제 아빠 나름 집에서 할 일을 하고 아이들은 숙제를 하고 간간이 아빠에게 질문을 하거나 장난을 친다.


이런 생활이 성격이 좋고 다정다감한 아빠여야만 가능한 모습일까? 현재 모든 전업주부의 모습이다. 성격과 관계없이 살림을 하고 육아를 하는 일반적인 '태도'이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아파서 쓰러질지언정’ 학교와 직장을 다니는 건 당연했다. 오히려 '쉬고 싶다' 고 하면 '누군 안 쉬고 싶나? 의지가 없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고 출근을 못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끌려가 '격리'가 돼버리기도 했다. 그 전의 생각이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걸,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일' '돈' '남자' '여자'에 대해 우린 어떤 고정관념을 가고 있을까?

휴직이 자주 반복되거나 경제력을 상실하고 생계가 힘들진 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남자, 여자의 범위를 넓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휴직은 언제든 할 수 있다는 뉴 노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살림을 맡고 여자가 경제권을 맡을 수 있다. 누구든 경력단절의 상황이 될 수 있으며, 육아휴직뿐만 아니라 아프거나 돌봄을 원할 때 휴직을 낼 수 있다. 자기 계발의 시간을 갖기 위해 배우자에게 의지할 수 있다. 삶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을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30년 후, 회사에서 승진한 딸이 가장 먼저 남편에게 전화해서 축하받고 남편이 아이와 함께 준비한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30년 후? 너무 멀다. 나부터 이런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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