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의 파편」 번외 - 평생팬이 되는 과정
안녕하세요!
오늘은 잠시 「희극의 파편」 시리즈를 접어두고 번외 편으로 돌아왔습니다.
희곡의 대사 한 조각, 장면 하나를 붙잡고 들여다보는 「희극의 파편」 시리즈를 연재하며
저는 오래된 감정의 표면을 꾹꾹 눌러보고, 웃기면서도 아픈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희곡을 읽고, 느끼고, 다시 분석하는 패턴의 방식은 어느 순간 정해진 틀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을 갖추는 건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스스로 갇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중간중간 번외편을 연재하여 그런 불상사를 예방하고자 합니다.
‘희극’이라는 단어는 꼭 희곡이 아니라도 우리 삶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이 번외편은, 그 흩어진 희극을 줍는 작은 산책입니다.
가볍고, 조금은 즉흥적이며, 말보다 여운이 많고,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웃을 준비는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ㅎㅎ 그냥 바라보면 됩니다.
1.
어렸을 때 저는 일요일 밤이 그렇게 싫었는데요. 왜냐하면 다음날 학교를 가야 하는데, 집에서 푹 쉬어야할 시간인데, 저는 늘 뜨거운 탕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엄마는 일요일마다 꼭 목욕탕에 가야만 했고, 덕분에 우리집은 '일요일은 목욕탕 가는 날'로 정해지게 됩니다. 가족들은 그날만큼은 모든 스케줄을 비워야 했습니다. 물론 목욕을 끝낸 후면 늘 비싼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곤 했지만 여전히 다음날 학교를 간다는 생각에 우울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렸을 땐 그게 당연한 건줄 알았는데.. 그렇게 부자인 줄은 몰랐고, 지금은 전혀 아니고 그지깽깽이입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제 기억 속 목욕탕에서 제 표정은 늘 안 좋았습니다. 지금이야 뜨거운 물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으 좋다' 거리지만, 그리고 오히려 시간이 없어서 목욕탕에 못 가지만, 그때는 왜 씻어야 하며, 왜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어야 하며, 왜 아빠에게 붙들려 따가운 때밀이로 몸을 밀려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느때와 다를 바 없는 일요일, 아마 제가 12살 때, 늘 마찬가지로 짜증 섞인 표정으로 탕에 들어갔다가 너무 뜨거워서 찬물에 다이빙을 했다가, 또다시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짓을 반복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산만하게 있지 말라는 형의 말이 언짢기도 하고 아빠에게 이상한 심술을 부려서 잔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날의 분위기와 감정이 정확히 기억납니다.
대리석 턱 같은 곳이라고 할까요? 이내 지쳐서 탕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곳에서 오른쪽 다리만 탕에 집어넣고 몸은 바깥에만 있는 그런 상태로 누워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일이라 꽤 민폐짓 같겠지만, 그 당시 제가 느끼기엔 몸집이 작아서 그 자세가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사람들도 그냥 어린 애가 누워있구나, 하고 넘기는 그런, 그러니까 아주 거슬리지는 않으며 약간 초점을 흐려서 주변시로 봤을 때 굉장히 이질감이 없는 그런 그림 속 한 장면처럼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욕탕 한복판에 누워 있으면... 필연적으로 잠이 오게 됩니다. 몸의 모든 힘을 다 뺀 상태로, 구멍이 뚫린 사우나 의자를 놓고 끄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느릿하게 내 귀에 울려퍼지고, 늦은 오후 해가 지기 전의 강렬한 마지막 햇살이 쪼그만 창 사이로 들어오고, 두꺼비 석상의 입에서 물이 콰르르 뿜어져나오고, 누군가 바람을 후 불어주듯이 물방울이 툭툭 내 얼굴을 치고, 마치 asmr처럼... 빨리 탕 안에서 몸을 불려야 때를 밀 수 있는데.. 난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고 있지 않다는 약간의 불안함과 급박함, 아빠에게 잔소리를 듣지 않을까라는 약간의 걱정과 또 그런다고 해서 순순히 말을 듣고 싶진 않은 순수 반골 기질의 마음이 혼란스럽게 뒤섞여서 결국 잠으로 이어지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때 잠결에 무언가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눈이 동그랗게 떠졌는데, 제가 봤던 건 다름 아닌...
이상하고 괴상한 허벅지였습니다.
누워 있으니 제 눈에 보였던 건 허벅지뿐이었는데요.
뭐 이런 허벅지가 다 있어? 하며, 자연스레 몸을 일으켜세웠습니다.
사진 속 허벅지처럼 근육질의 허벅지와는 조금의 결이 달랐습니다. 오히려 저렇게 미세한 혈관이 보이는 근육이 아니라 그냥 짱짱한 알타리 무 같은 허벅지였습니다. 그냥 몸이 두꺼운 사람이면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이구나, 하며 넘길 수 있겠지만, 아니 몸이 두꺼운 건 맞는데 유별나게 그 허벅지만 눈에 거슬릴 정도로 언발란스하게 거대했습니다. 그냥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어린 마음에 바로 옆에서 그 허벅지를 계속 관찰했습니다.
아무튼 전 그날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의 허벅지가 얼마나 대단했던지를...
그리고 알 것만 같습니다.
이 선수가 왜 마흔 살이 넘어서도 야구를 잘하고 있는지를...
대구 서변온천, 당시엔 삼성 소속이었으니, 시즌 중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당시 대구는 야구의 도시, 삼성 왕조 시절, 저는 베이징 키즈 출신의 야구 광팬이었습니다.
아빠에게 혼이 난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아빠, 맞지? 맞지?
어? 뭐야? 맞는 것 같은데
뭐야? 나간다! 때도 안 밀고 나가는데?
탕에 들어간지 10분도 채 안 되어서 샤워실에서 물만 쓱 적시고 무심히 나가는 저 사람을 붙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너무 무섭다. 너무 거대하다.
저는 수건을 닦고 있는 저 사람한테 가서 그 찰나의 순간에 수백번 고민을 하고, 지금 아니면 기회는 영영 없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호..혹시 야구선수.. 맞아요?
그러더니 말을 무시하는 것 같더니 제 옆을 지나가면서 응, 맞아. 하더랍니다.
그리고 아빠가 파워에이드를 저에게 건네면서 '저 사람한테 주고 와라', 했고
전 카운터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종이와 펜을 함께 들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전 이 사람의 평생팬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2.
그리고 그 싸인지는 당시 제가 가장 아끼던 유희왕 카드집 맨 뒷장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ㅎㅎ
전 아직도 어렸을 때 너무나 가지고 싶었던 유희왕 카드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어른들이 괜히 피규어를 사고 싶어하는 이유를 전 여기에서 찾곤 합니다.
참고로 저 '푸른 눈의 백룡'과 '붉은 눈의 흑룡'은 꽤 가격이 나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옛날 오리지널 버전이고 중고거래 사이트에선 7-8만원으로 팔고 있더군요.
그리고 왼쪽 밑 화려한 노란 새는... 세 장의 신의 카드 중 하나로 무려 '라의 익신룡' 일어 버전입니다. 지금 못 구하는 버전이랍니다..
집에 당장 불이 난다면 저는 핸드폰 지갑 여권? 그리고 아무튼 이 유희왕 카드집 또한 들고 갈 것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