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그래, 선장에게 주었지만, 그것으로 일이 다 된 건 아니야. 자, 모두들 잊지 마시오. 우린 밀항자들인 선장에게 뱃삯을 냈다 할지라도 그건 우리에게 별 도움을 주지 않을 거요. 오히려 손해를 주면 주었지. 이를테면 다른 놈들인 이 배의 선원들이 우리의 냄새를 맡아서 잡히는 날엔 어떻게 될지 아시오?
다
(한참 생각하고 나서) 몰라. 어떻게 될지.
가
당신들은?
나, 라
모르겠는데...
가
다들 모르는군, 나만 제외하고선. 내가 가르쳐 드리지. 다른 놈들이 우리를 붙잡으면 우선 선장에게 데려 갈 거요. 그는 이 배의 우두머리니까.
나, 다, 라
그것 참 잘 되겠군요. 우린 선장에게 돈을 냈으니 그가 우리를 돕겠지요.
가
바보 같은 소릴 마시오. 다른 놈들 앞에서, 우리가 뱃삯을 치뤘으니 이 배를 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 선장의 입장이 난처하게 돼. 선장은 우리 뱃삯을 혼자만 먹으려는데 다른 놈들이 불평을 할 거요. 그럼 선장은 돈을 나누든가, 아니 나눌 리가 없고 선장은 분명히 이렇게 명령할 거야. "난 저 사람들을 알지 못해. 뱃삯을 받은 일도 없구. 아마 저 사람들이 몰래 이 배 안에 기어 들어 왔겠지. 어서 바닷속에 처 넣어 버려!" 이젠 알겠소?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사유해보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서른아홉 번째 작품은 이강백의 '다섯'입니다.
내용은 정말 간단합니다.
배 밑 창고실에 밀항을 하는 네 명의 남자 가, 나, 다, 라와 한 명의 여자 마가 있습니다. 제주도로 가는 배인데 그곳에서 다섯은 새로운 인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단편 희곡이 그렇듯 이렇다 할 결말은 없지만, 온갖 인생의 부조리와 실존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선 '라'가 '마'에게 엉뚱한 사랑 고백을 합니다.
제가 선별한 장면은 이러합니다.
사랑고백 뒤, '라'는 더 이상 숨는 데 지쳤다는 듯 충동적으로 선장에게 올라가겠다고 선언하는데요. 하지만 막상 그런 말을 하고 나니,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라
선장이 우리의 상황을 알거나 모르거나 그건 상관없어. 그저 우리는 우리들 나름대로 행복하기만 하면 돼. 여러분들도 물론이지만, 나는 맨손 체조를 굉장히 많이 하였소. 통 속에, 상자 속에, 들어갔다간 나오고 나왔다가 들어갔으며(그들은 경보음이 울리면 각자의 상자 속에 숨었다.) 달리기, 장애물 넘기, 팔다리 굽혀 펴기 등을 열심히 한 것이지요. 몸과 마음에 신선한 활력을 주는 운동, 목이 타는데... 체조는 근육과 허파를 튼튼하게 해줍니다. (목을 두 손으로 붙들고) 목이 타는구만. 선장이 마실 물을 주면 난 좀더 행복하겠는데. 물론 거저로 달라는 건 아니구, 서로 바꾸어 갖자는 것이지. 나는 선장에게 줄 것이 많어. 그걸 보면 난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내가 그이에게 물과 바꾸려고 내놓을 물건이 무엇인가 여러분은 아시오?
그것은 태양이야! 그이가 나에게 물을 한잔만 준다면, 난 그이에게 태양 가운데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일억 헤타를 넘겨 주겠어. 그이가 두 잔의 물을 준다면 난 태양의 동전만한 부분을 남기고 기꺼이 다 주겠어. 나는 한잔의 물로 내 목을 적시고 나머지 한잔은 저 여자에게 줄 테요. (라는 마(그녀)를 가르킨다.) 그리고 동전 한 잎만한 크기의 태양이면 충분해. 그것을 오색 실에 매달아서 저 여자의 상자 속을 밝히고 서로 사랑을 하겠어요.
나
허리에 꽃을 두르구?
라
물론이지요.
나
(환성을 지르며) 축하합니다.
라
고마워요. 나는 지금 내 생애 중 가장 행복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내가 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발표하지요. 내가 소금에 절인 정어리로 오해 받고선 내 통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더군요. (그들은 경보음이 울리면 각자의 상자 속에 숨었다.) 그래서 저 여자의 상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저 여자는 나를 거절하지 않았어요. 마음씨 고운 여자랍니다. 불안하고 초조롭게 경보종이 울리는 동안 우린 서로 껴안고 있었어요. 그 어두운 상자 속에서도 저 여자의 몸은 부드럽고 따뜻했어요. (마에게)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 여보? (마는 아무 말 없이 자기의 상자를 서너 번 두드리다 그만 둔다.)
가
(라에게 악수를 청하며) 축하하오. 그런데 새 살림을 꾸미려면 그 좁고 어두운 상자 속에선 곤란하지 않겠소? 앞으론 아이들도 태어나겠구.
라
네, 아무래도 아파트를 얻어야 하겠지요.
나
이건 내 경험으로 말하는 겁니다만, 아파트를 얻으시려면 햇볕 바른 언덕 위가 좋아요. 신선한 바람이 잘 통하고 홍수가 나도 물에 잠길 염려가 없으니.
라
네. 나도 그런 곳에 아파트를 얻으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아내도 좋아할 거라 생각해서요.
다
강아지를 길러 봐요. 귀여운 놈으로 두 마리를. (가까이 라에게 다가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혹시 당신이 저 여자의 아버지를 때려 죽인 원수가 아니신지?
라
천만에요. 나도 강아지를 기를 예정입니다.
다
당신은 열심히 일해야 하겠소. 새 살림에는 비용이 많이 듭니다. 많이 들지 않겠지만.
(생략, 라는 갑자기 심각한 갈증을 느낀다.)
라
(갈증에 타는 자기의 목을 두 손으로 껴안고 서성거리며) 목이 타. 그래, 우리들의 행동은 언제나 이렇지. 두려워 하구, 항상 제자리로 돌아가기만 하지. 목이 타는군! 나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지긋지긋해!
이젠 정말 행복하고 싶다구. 나는 선장에게 태양을 주러 가겠어. (라는 마의 앞을 지나다 멈춘다. 마에게) 난 당신을 사랑해.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해요. (마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얹는다. 마가 라의 고통스런 표정의 얼굴을 바라본다.) 당신은 이 배를 탄 후,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 이젠 물 한두어 잔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지. 맞아, 당신의 생각이 옳아.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한두어 잔의 물이 아니야. 마시면 다시 갈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나는 더 이상 물을 원하지 않겠어. (생략) 선장에게 태양을 주러 가겠어. 나를 믿어줘. 여러분들도 나를 믿어 주시오. 조금 있으면 다시 경보종이 울릴 거요. 난 상자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고함을 지르겠소. 다른 놈들의 귀에 내가 외치는 음성이 들릴 때까지 난 계속 고함을 지르겠소. 나를 잡아 선장에게 데려가겠지. 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지 않겠어. 그이를 만나서 빙그레 웃으며 태양을 아무 대가 없이 드린다고 말할 거요. (마는 계속 침묵을 지킨다.) 물론 굉장한 용기가 있어야 그렇게 하겠지. (마에게) 그러나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용기쯤이야 얼마든지 낼 수 있어. (라는 마의 어깨를 붙들고 흔든다.) 나를 사랑해! 어서 좀 사랑하시오. 사랑해 주오!
가
저 사람이 웬일이야?
라
(마에게 호소한다.) 당신의 사랑만 있으면 난느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겠어. 선장에게 줘 버리겠어, 처음부터 끝까지. 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 낙원의 나라로 가는 것도 그만 두겠어.
나
당신은 경보종이 울릴 때, 정말 상자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고함을 지르겠소?
라
(마의 손을 잡고) 그럴 테요.
다
여봐, 어쩌면 그렇게 당신은 융퉁성이라곤 있질 않소?
나
다른 놈들이 당신을 붙잡아 선장에게 데려갈 거야.
라
난 그 이를 만나서 모든 것을 돌려줄 겁니다.
가
당신을 바닷속으로 처 넣을 거야.
라
그 이가 원한다면 나 자신마저도 줄 것이오. (마를 가르키며) 비록 바닷속에서 죽을지언정, 나는 영원한 이 여자의 사랑이면 충분해요. (마에게) 나를 사랑하오? (생략) 당신에겐 사랑을 드리지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용기가 생긴 나는 비록 이 모양이 됐지만, 다른 남자들보다 용감한 사람이오.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하고 여자에게선 사랑을 받아야 할 용감한 사람이라구. 경보종이 울리면 나는 고함을 지르겠소. 여보, 나를 사랑해야 하오.
가
경보종이 울리거든 당신은 당신의 마음대로 하우. 하지만 우린 처음으로 돌아가는 중이니, 우리가 상자나 통 속으로 잘 숨은 뒤에 소리 질러요.
경보종이 울리고 적색 신호등이 번쩍거린다. 가, 나, 다 황급히 라와 작별의 악수를 하고 제각기 상자와 통 속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아 버린다. 마도 그녀의 상자 속으로 들어간다.
경보종은 계속 요란하게 울린다.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점멸한다. 라는 서성거리며 가, 나, 다, 마의 상자와 통들을 기웃거리지만 모두 뚜껑이 닫혀 있다. 라는 몇 번이고 소리를 지르려 노력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입만 벙긋거리다가 그만 둔다. 이제 라에겐 소리를 지를만한 용기가 없어 보인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더니 마의 상자 속으로 들어가려고 뚜껑을 열려 한다. 그러나 마의 상자 뚜껑은 단단하게 닫혀 있어 열려지지 않는다. 라는 마의 상자 앞을 물러나서 소금에 절인 정어리가 들어 있는 자기의 예전 통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다.
몇 분이 지나 경보종의 울림과 신호등의 번쩍임을 중지한다. 가, 나, 다, 마 각자의 상자와 통 속에서 나와 그것들 위에 올라 앉는다.
가
(사방을 둘러보며) 그는 가버렸군. 용기가 있구 또 사랑을 할 줄 아는 행복한 남자였는데.
다
갔군요.
마
(손으로 날갯짓을 하다가 그만둔다.)
나
우린 낙원으로 갑시다. 아내가 허리에 꽃을 두르고 기다리며 있지요.
라는 통에서 나오지 않는다.
막.
어떤가요? 말은 참 그럴싸했는데...ㅎㅎ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깊게 사랑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나요?
2. 사랑 뒤의 죽음은, 그것은 낭만인가요?
3. 그것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진지한 삶을 사나요? 아니라면 그것에 대한 관념은 너무 과한 것인가요?
4. 나는 죽음과 관련되게 살고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인가요?
5. 무엇이 중요한가요? (영화 F1을 보고 난 뒤의 후유증..)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밥 먹었니? 밥 먹었어?
-이박사
오늘의 노래입니다.
내가 아줌마가 되면
당신은 아저씨가 되는 거야.
아무리 멋진 말만 하고 있어도
배가 나와 있을 거라고.
진정한 낙원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