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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모 Feb 26. 2021

7-2. 죽음의 무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줘



자고 일어나니 목이 칼칼했다.

부산한 아침 공기에도 평소처럼 몸을 바로 일으키지 못한 나는 어물쩡거리다 세면대 앞에 선다.

콧속의 끈적한 액체를 목젖으로 밀어 넣어 뱉은 가래는 노랬다. 지난밤 꾼 더러운 꿈처럼.

언제쯤 그 장면에서 도망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영원히. 선생님은 이 기억을 없앨 수는 없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별로 희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시한부 선고를 한 의사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너에게 일어난 일들에 유감을 느끼지만 앞으로 큰 변화는 없을 거라며 단정 지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부정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넌 죽는 게 낫다고 말해주는 게 내 선택에 확신을 주는 좋은 방법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 살아서 이 글자들을 타이핑하고 있느냐 물으면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제주도 여행이 너무 좋아서였다고 변명하고 싶다. 다시 가고 싶은 공간이 생겨서, 그 하나로도 충분했으면 좋겠다.


새파란 제주도 바다는 내가 이 세상에서 먼지처럼 느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렸을 때는 대통령처럼 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아니면 힘든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은 극소수라는 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파란 물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할 것 같았다. 빌 게이츠나 곧 죽으려는 나나.

살아 있는 사람의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말이, 죽으려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석될지가 궁금했다.

죽으려던 사람으로서 죽은 사람의 어제를 궁금해한다고 말해본다.

또 자의로 죽으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겠지만 결국 죽는 것은 같으니.


누구는 자살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한다. 맞는 말일지 모른다.

나도 그 일련의 일들이 없었으면 대학에 들어가 즐거운 대학생활을 하고, 연애를 하고 돈을 모아 방학이면 여행을 가려고 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못한 지금의 나는 그래도 몸 누일 침대가 있는 것에만 만족한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기도 하고 게임을 조금 하다가 다시 잠드는 그런 비루한 시간들.

괜한 명언들을 보면 자극보다는 쓸모없는 너는 사라지는 게 낫다고 입 모아 말하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살아있으니 제주도 해변에 누울 수 있는 날이 다시 오지 않을까.


아직, 살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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