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도 된다고 말해줘
자고 일어나니 목이 칼칼했다.
부산한 아침 공기에도 평소처럼 몸을 바로 일으키지 못한 나는 어물쩡거리다 세면대 앞에 선다.
콧속의 끈적한 액체를 목젖으로 밀어 넣어 뱉은 가래는 노랬다. 지난밤 꾼 더러운 꿈처럼.
언제쯤 그 장면에서 도망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영원히. 선생님은 이 기억을 없앨 수는 없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별로 희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시한부 선고를 한 의사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너에게 일어난 일들에 유감을 느끼지만 앞으로 큰 변화는 없을 거라며 단정 지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부정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넌 죽는 게 낫다고 말해주는 게 내 선택에 확신을 주는 좋은 방법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 살아서 이 글자들을 타이핑하고 있느냐 물으면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제주도 여행이 너무 좋아서였다고 변명하고 싶다. 다시 가고 싶은 공간이 생겨서, 그 하나로도 충분했으면 좋겠다.
새파란 제주도 바다는 내가 이 세상에서 먼지처럼 느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렸을 때는 대통령처럼 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아니면 힘든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은 극소수라는 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파란 물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할 것 같았다. 빌 게이츠나 곧 죽으려는 나나.
살아 있는 사람의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말이, 죽으려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석될지가 궁금했다.
죽으려던 사람으로서 죽은 사람의 어제를 궁금해한다고 말해본다.
또 자의로 죽으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겠지만 결국 죽는 것은 같으니.
누구는 자살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한다. 맞는 말일지 모른다.
나도 그 일련의 일들이 없었으면 대학에 들어가 즐거운 대학생활을 하고, 연애를 하고 돈을 모아 방학이면 여행을 가려고 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못한 지금의 나는 그래도 몸 누일 침대가 있는 것에만 만족한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기도 하고 게임을 조금 하다가 다시 잠드는 그런 비루한 시간들.
괜한 명언들을 보면 자극보다는 쓸모없는 너는 사라지는 게 낫다고 입 모아 말하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살아있으니 제주도 해변에 누울 수 있는 날이 다시 오지 않을까.
아직, 살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