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문학의 의미는 무엇일까. 20대 중반이 넘고 처음 읽어본 청소년소설이 내게 준 첫인상은 이런 의문점에 지나지 않았다.
청소년문학이라면 단연코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청소년 권장 도서라 불리던 책들은 나를 포함한 학생들을 곤욕에 빠뜨리곤 했다. 말이 권장이지, 선생님이나 우리나 독후감을 제출하고 검사하는 데만 열을 올렸더랬다. 게다가 기억하기론 당시의 권장 도서 목록은 제목만 봐선 무슨 내용인지 짐작도 안 가는 고전 문학이 대부분이었다. 그 덕분에 그때는 책과 가까워지려야 자꾸만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숨통 조이는 입시 공부는 고사하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군대에서 책 읽는 습관을 길들인 이후로 나는 꽤 많은 양의 책을 꾸준하게 읽었다. 나를 괴롭게 했던 고전도 여럿 독파해 갔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평소처럼 알라딘 온라인 서점에 접속했다가 처음 보는 작가의 소설이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오른 것을 보았다. 클릭해보니 청소년소설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익숙한 이꽃님 작가와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를 처음 발견한 건 그때였다. 한때 청소년소설 <아몬드>가 놀라울 만한 성적으로 팔릴 때도 읽지 않았건만, 이쯤 되니 종합 베스트셀러에서 이따금 보이는 청소년소설이란 기묘한 이름에서 거부감보단 호기심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책을 구매하고 다른 청소년소설도 여럿 읽었지만, 나는 오랫동안 애매모호한 답도 내리지 못한 채였다. 청소년문학이란 이름이 청소년 독자를 상정하기 때문인지, 청소년 주인공이 나오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청소년이라는 낱말에 내가 모르는 어떤 뜻이 있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청소년소설이 오히려 청소년을 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개중에는 설정과 결말에서 교훈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야기 자체가 유치해지거나 진부해져 소설이 아닌 것 같은 작품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청소년이라면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모든 작품이 그랬던 건 아니었다. 학생들이 쓴 시집 『내일도 담임은 울삘이다』는 다른 청소년문학에선 찾을 수 없었던 감동을 주었던 작품이었다.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북공업고등학교’(지금은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의 학생들 80여 명이 쓴 시를 엮은 시집으로, 사회와 어른에 가려진 다채로운 학생들의 삶을 시로 만나 볼 수 있다. 그리고 시를 하나씩 읽다 보면 학생들에게 교실은 비단 학교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어떤 학생은 공사 현장으로 출근하는 일상을, 다른 학생은 짜장면을 배달하려 오토바이를 타는 일상을 회상하며 시를 썼다. 나는 여러 청소년소설이 말하는 온건함에서 벗어나는 일탈적인 이들의 시에서 희열을 맛보았다. 그리고 청소년문학을 쓰는 어른들이 알지 못하는 청소년만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때 조금 알게 되었다.
공고 학생들이 직접 쓴 시가 시집으로 출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국어 교과와 담임을 맡았던 김상회, 정윤혜, 조혜숙 선생님의 노고가 있었다. 이들은 2008년부터 3년 동안 담당 학생들에게 기존 교과목 대신 ‘시 쓰기’를 지도했다. 어쩌면 허무맹랑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 쓰기 수업’이 3년 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교실에서 마주 보았던 학생들이 규격화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시집을 엮은 선생님 중 한 명인 김상회는 자신이 마주했던 학생들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썼다. ‘점심시간에나 모습을 드러내는 오후반 학생, 매사에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학생, 덩치는 크나 유아기적 사고를 못 벗어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교사에게 위협적으로 대드는 학생, 경찰서와 법원을 다니느라 바쁜 학생, 가출해서 한 달째 연락이 닿지 않는 학생, 수업 시간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116p).’ 또 다른 엮은이인 조혜숙은 처음 전근왔을 때에 ‘학생들이 수업 준비를 거의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것이 무척 낯설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겪은 것이 시가 된다」, 80p).
그리하여 선생님 세 명은 ”그때그때 욕구를 뱉어가며 살아가는 학생들의 삶에 제동”을 걸기 위해 수업 시간에 교과서 대신 A4 용지와 색연필, 사인펜, 시 몇 편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에 학생들은 내키진 않아도 “일단 짧다니까 써 보려고 했다”. 그리고 3년 동안 ‘시 쓰기’는 정규 수업을 대신해 계속되었다. 나는 이 대담한 시도가 결국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학생들은 시를 쓰면서 각자의 일상에서 솔직한 자기 목소리를 찾는 방법을 배웠다. 한편 선생님들은 학생이 쓴 시를 보며 통제가 불가능해 보였던 모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공교육이나 다른 청소년문학이 조명하지 못했던 회색지대를 보았다. 어쩌면 청소년문학은 이 시집이 보여주었듯 주어진 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청소년에게 잠재한 세계를 열어 보이는 데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기에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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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담임 - 김동진
담임은 울보다
우리가 쪼금만 잘못해도 운다
다른 선생님 시간에 떠들어도 운다
대들다가 울면 우리만 불리해진다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
나도 새로운 곳을 향해 달릴 수 있을까? - 전현준
사백 미터 트랙을
세 바퀴 반 일곱 바퀴 반
앞사람 다리만 보고 달렸다!
난 늘 뒤에 있었지만
천오백 미터, 삼천 미터
운동선수였다
운동을 그만둔 지금
나는 무얼 해야 할까?
내 인생의 트랙을 잃어버린 것처럼
어디를 뛰어야 할지 모르겠다
가출 - 김부찬
짐을 쌌다
겉옷 한 벌 속옷 한 벌
새벽 두 시 집을 나갔다
해 뜰 때까지 돌아다녔다
아는 형이랑 부산에 갔다
찜질방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피시방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노래방에 가서 또 시간을 때웠다
가출도 반복된 일상
학교처럼 지겨워졌다
자, 이제 돈도 떨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최후의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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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에서 청소년문학을 유지하는 원동력을 확인한 나는 이어서 오세란 청소년문학 평론가의 평론집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문학의 세계』를 읽기 시작했다. 미리 말하자면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문학의 세계』는 내게 청소년문학의 다채롭고 깊은 세계를 안내해 주었으며, 나는 여기서 청소년문학의 의미와 전망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청소년 권장 도서와 일부 청소년문학에서 느끼는 거부감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깨달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청소년문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청소년’이 인격체로 주목받지 못했던 시간이 있다.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문학의 세계』 1부 「청소년소설다움을 넘어서」에서는 청소년문학의 오랜 꼬리표 “청소년문학은 온건한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대답을 담았다. 청소년문학은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성장 소설 혹은 교양서라는 좁은 의미로 잘못 이해되어 왔다. 저자는 이 현상을 청소년을 어른과 다른 비인격체로 취급하고 그들을 ‘타자화’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라고 설명한다. 즉, 청소년을 위한 문학임에도 편견 어린 인물들이 등장해 정작 현실의 청소년들이 설 무대가 없어진 셈이다.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에서 박준석 학생이 쓴 「내 나이 열아홉」은 어른들의 시선에 청소년이 느끼는 답답함을 보여준다.
‘남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열아홉은 꽃다운 나이라고 한다/ 하지만 열아홉은 꽃다운 나이가 아니다/ 각자 무거운 짐을 하나씩 들고 있다/…/ 내 인생의 열아홉은/ 최고로 고민이 많은 나이’ (‘내 나이 열아홉’·박준석)
열아홉의 학생을 보고 ‘꽃다운 나이’라고 하는 어른의 마음은 진심에 가까우리라. 그 말을 한 어른은 열아홉이란 어린 나이가 품고 있는 젊음과 무한한 가능성이 부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박준석은 젊음을 무심히 찬미하는 말에 숨어있는 관념을 마주하였다. 그것은 청소년을 단순히 덜 자라고 미성숙한 존재로만 바라보는 시선이다. 청소년이 겪는 고통이나 욕망은 청소년을 천진난만하고 어린 존재로 보는 어른의 시선 아래 사라지기 쉽다. 이를테면 ‘그 나이 때 고민은 고민도 아니다’는 식의 허울뿐인 말이 그렇다.
저자는 이에 관해 ‘청소년 독자는 ’스트리밍’의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에 접속하고 다양한 삶을 체화하며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데, 어른들은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을 저장하고 오래된 버전의 프로그램으로 청소년을 재단하고 있는 꼴’(「청소년소설다움을 넘어서」, 79p)이라고 설명한다. 지금 시대 청소년은 어느 세대보다 자신의 선택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주체다. 일반적으로 성인은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태도를 반영하고 강화해 주는 문학 텍스트들을 선호하는 반면, 청소년 독자는 텍스트에서 자신들의 개성과 실제 삶에 통합할 수 있는 아이디어, 정보, 가치 등을 텍스트에서 적극적으로 찾는다.* 더불어 어느 세대보다 온라인 환경에 익숙한 청소년은 기술을 활용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보를 전유하고 재해석하는 데 능통하여 자신의 정체성 탐구에 능동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홍인선, 「청소년의 삶과 청소년 문학 독서의 의의」, 「교양교육연구」 6(3), 한국교양교육학회, 2012, 437쪽.
이에 따라 저자는 청소년문학이 다양하고 새롭게 나타나는 청소년 삶의 특질과 문학 담론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르문학은 ‘청소년 독자에게 교육이 아닌 재미를 제공하려는 시도’라는 점과 적절한 무대를 활용해 현실에서 한 발짝 나아간 청소년의 세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그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한편, 전통적인 리얼리즘은 이른바 ‘속삭임의 서사’를 앞세워 장르의 변화를 이룩한다. 속삭임의 서사란 ‘굵직한 사건을 통해 독자에게 일방향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어느정도 내려놓은 것’(「청소년소설다움을 넘어서」, 68p)이다. 그러므로 속삭임의 서사에서 중점은 자연스레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옮겨간다. 의도된 묘사 방식은 독자가 사건의 모양새를 짐작하는 단서가 되고, 단서를 통해 유추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짐작하게 된다. 이렇듯 주요 두 갈래에 생겨난 변화는 주인공인 현실 속 청소년과 나란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전제를 품고 있다. 저자인 오세란 평론가는 이에 관해 서문에서 청소년문학을 ‘날개 잃은 성인이 돌아보는 결과론적 과거의 성장담’이 아닌 ‘전위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요컨대 제목으로 쓰인 ‘아름다움’에는 청소년이 ‘청소년다움’을 넘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길 바라는 마음이 녹아 있다.
사람들은 추억은 추억으로 머물러 있기에 아름답다 말한다. 좋았던 추억을 끄집어와 재현하려 하면 기대만큼 실상이 아름답지 못하단 이유겠지만, 한편으론 추억 같은 건 나와 단절된 과거의 유물로 머물러 있는 편이 쉽고 편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역시 어른이 되면서 세상에 거칠게 반항하고 싶은 아이의 모습이 내게도 있었다는 사실을 언젠가 잊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길거리의 소년과 소녀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때로는 전율키도 하는 까닭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적어도 청소년문학을 읽기 시작하면서 내게 아이의 모습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기억의 한 지점으로 어렴풋이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청소년문학에 이토록 이끌리는 마음은 그동안 겪어온 미지에 놓여있던 탐독의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 한 문학 장르의 단면이 아닌 아이의 모습을 한 겹겹의 세계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청소년문학에 대한 호기심과 의심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제는 청소년문학이 독자가 세상에 한 발짝만 내딛도록 돕는 일종의 마중물이라고 믿는다. 마중물은 펌프를 이용해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배관에 미리 넣어두는 물을 뜻한다. 다시 말해 마중물은 일종의 촉발제다. 청소년문학도 마찬가지다. 오세란 평론가의 말마따나 청소년을 신뢰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청소년문학의 시작이자 끝이며 청소년문학을 쓰는 어른에게 주어지는 책무다.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는 청소년에게 가장 가까운 어른인 선생님이 사회 규격에서 조금 멀어진 학생들을 믿기 시작하면서 탄생할 수 있었다. 마중물로 쓰이는 청소년문학은 청소년 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다독이는 어른에게도 이해와 공감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준다. 나는 앞으로도 이 문학 장르가 마중물처럼, 청소년이 어른의 세계로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