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함께 개강이 왔다. 슬프다… 이제 겨우 일 주차인데도 무척 바빴다. 졸업 학기라 듣는 수업도 몇 개 없건만, 나는 굳이 굳이 할 일을 찾아 시간을 채운다. 취준생이니까. 수업이 끝나면 밤이 될 때까지 도서관에 남았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 도서관에 갔다. 책도 읽고 서평도 쓰고, 이번 주는 책 읽는 시간도 모자라지만 출판사가 발행하는 뉴스레터 몇 개를 구독하고 좋은 문학 웹진을 찾아 챙겨보기도 했다. (내 눈 건강은 누가 챙겨주나. ㅜ.ㅜ) 새로 구독한 뉴스레터 중 하나가 문학동네에서 발행하는 월간 ‘계절공방’이다. 격주 금요일마다 발행되는데, 마침 이번 주 금요일이 발행일이라 구독하자마자 뉴스레터 하나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이번 계절공방 주제는 ‘망중한 忙中閑’.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바쁜 가운데 잠깐 얻어 낸 틈.’이란 뜻이다. 가을이 된 만큼 한숨 돌리는 의미로 선정된 주제인 듯하다. 그런데 어떻게 나랑 꼭 맞는 주제를 만나게 되었네. 나도 망중한에 뉴스레터를 읽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뜨끔한 문장. 뉴스레터의 한 문장이 책상 앞에 졸고 있던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어쩌면 우리는 틈에 대해 일종의 강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틈마저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고, 무언갈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가장 시원한 바람은 틈새로 불어옵니다. 조형미는 여백이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고요. 우리가 오늘, 틈을 내 망중한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하하. 어떻게 알았지? 나는 짬 내서 뉴스레터를 읽지만… 이 문장대로 조금은 여유를 가져야겠다. 나는 글을 쓸 때 다음 문장이 써지지 않으면 곧잘 산책을 나가는데, 산책길에서 돌연히 문장이 마구 조합돼서 떠오르는 경험을 할 때가 많다. (산책이 창조적 행위라는 데 동의해야 할 것 같다.) 허무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결국 열심히만 한다고 무조건 앞으로 나가지는 않는 셈. 삼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랄까. 높이 뛰기 위한 움츠리기랄까.
일하는 편의점 고양이
텍스트힙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 독서율은 4.5%p가량 떨어졌다. 성인 10명 가운데 약 6명이 1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다. 반면 최근 젊은 세대가 독서를 향해 보이는 높은 관심은 놀랍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10대 청소년의 종합 독서율은 95.8%로 종이책과 전자책 모두 이전에 비해 고르게 증가했다. 성인의 종합 독서율이 10년간 추락하는 반면 10대 청소년의 종합 독서율은 지난해를 기점으로 해 상승세로 전환되었다.
왜일까? 나는 젊은 세대가 SNS에서 벗어나 책에 빠져드는 현상이 마냥 낯설진 않다. 뉴스 화면으로 송출된 짧은 화면조차 밈으로 사용되는 시대에, 책이라고 그러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젊은 세대는 항상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을 재해석하고 전유해 왔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밑동이 아니라 곁가지다. 본질보단 껍질. 껍질을 유희한다. 정체성을 어느 세대보다 주체적으로 찾아 나서는 젊은 세대는 취향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새로운 정체성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밑동을 채우는 것은 이 공동체다. 어떻게 보면 웹소설 등에서 하위 장르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정립되는 원인도 이와 마찬가지다.
출처: 〈2023년 국민독서실태조사〉
이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텍스트힙’이다. ‘텍스트힙’은 Z세대 사이에서 독서를 ‘힙’하게 여기는 유행이자 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해외 SNS에선 이미 책 관련 해시태그를 달아 독서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하는 문화가 정착했다고 한다. 책을 매개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Z세대의 SNS 활동은 이들에게 존재하는 공동체를 향한 욕망과 주어진 정체성을 전복하려는 욕망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 때문에 과연 이러한 흐름이 주류로 편입되어 텍스트힙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때도 Z세대에서 꾸준한 독서율 상승세를 보일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선 Z세대가 일명 ‘디토 소비 Ditto’,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 등 오피니언 리더가 추천한 책을 따라서 소비하는 경향에 크게 치우쳐 있으며, 이에 따라 출판계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상황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출판사는 최근 ‘텍스트힙’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독자로 떠오른 Z세대에게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마케팅 수단을 점차 도입하는 추세다. 출판 전문 웹진 출판N은 이번 호에서 ‘텍스트힙’ 문화가 새롭게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팝업스토어’를 꼽았다. 팝업스토어는 한 집단이 공유하는 문화 코드를 오프라인 공간에서 구현해 전시와 캐릭터 굿즈 판매 등이 일정 기간 이루어지는 곳을 지칭한다. 팝업스토어는 단순 상품을 사고파는 가게의 의미를 넘어 동일한 문화 코드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적 경험과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놀이 공간’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팝업스토어는 단기간에 특정 정체성을 집단으로 향유하고 동시에 기존 정체성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나는 Z세대에게 상품을 마케팅할 수 있는 적합한 마케팅 수단이 된다. 출판사는 Z세대가 주로 소비하는 책을 둘러싼 문화 코드를 발견하거나 창조해 내고, 그것에 따라 팝업스토어를 어떻게 꾸미고 채울지에 관해 기획한다. 그리고 준비한 공간에 찾아온 독자는 굿즈를 사고, 인증사진을 남기고, SNS에 기록을 남기면서 다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곁가지를 뻗치는 과정은 반복된다.
‘텍스트힙’ 문화는 스러져가는 출판 업계를 일으킬 희망이 될까? 아니면 풍전등화에 불과할까? 확실한 것은 텍스트힙 유행이 언젠가 사라지고 다시 10대 청소년의 독서율이 떨어진다고 해도, 책과 텍스트를 신성한 것으로 취급하는 엄숙한 태도는 출판 시장에서 소수의 관점으로 남으리란 사실이다. 책은 앞으로도 일종의 ‘텍스트 콘텐츠’로 사람들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쓰일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4월 발표한 <제4차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2024~2028)>에서 시민이 책에 갖는 부담을 줄이고 접근성을 높이도록 ‘독서 환경’을 개선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청계천에 위치한 ‘책 읽는 맑은 냇가’ 같은 야외 도서관이나 책 읽는 공간을 마련해 일상에 책을 편입시키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 정책에 관해 일각에선 시민이나 민간기관이 협력하고 참여할 기회가 정책에서 제외되었다고 지적했다. 공간은 있지만 ‘팝업스토어’처럼 책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이 직접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셈이다. 나는 지금의 독서율을 유지하거나 반전시키기 위해선 독자와 작가, 그리고 출판사가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다. Z세대를 넘어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책과 이야기를 플랫폼의 중추로 세우기 위해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발 빠른 출판계의 대응과 민간의 협력이 동반되어야 하리라.
가을 실바람이 분다. 여름의 끝자락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은 채 가시지 못한 열기를 품고 뭉게구름을 마저 밀어내고 있다. 한 계절을 지나가는 뒤숭숭한 마음을 대변하듯 저번 주 일간지•주간지 북섹션에는 2030세대의 ‘불안’을 주제로 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2030세대가 '불안한 세대'로 불리며 각 신문사에 기삿거리로 등장한 이유는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에서 7월 말 출간한 조너선 하이트의 서적 <불안 세대>에 있다. <불안 세대>는 저번 주까지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7위, 인문 분야 3위에 오르며 화두에 올랐다. 온라인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왜 10대의 SNS 사용을 제한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불안 세대>는 2024년 최고의 문제작으로 떠오르며 8월 4주 차(8.22~28)에는 전주 대비 74.6% 판매량이 상승’했고, ‘자녀의 SNS 사용 빈도에 대해 고민이 많은 40대가 전체 구매자 중 54.5%를 차지하며 판매를 견인했다’고 한다.
반면 한겨레 북섹션에는 <불안 세대>를 보는 비판적인 시선이 담긴 글을 실었다. <불안 세대>가 말하는 대로 휴대폰과 SNS가 청년 세대가 느끼는 불안함의 궁극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불안 세대> 책 기사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휴대폰마저 뺏겠다고!’라는 제목으로 조너선 하이트 주장에 관한 다른 생각이 담긴 글을 써보고 싶네요.” 20여 년 놀이운동가로서 살아온 편해문 작가가 오랜만에 연락해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게임이나 기술의 부정적인 부분을 소리 높여 비난한다고 해도 우리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했던 일상적 간섭과 제지와 금지의 발자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략) 그들 또는 게임을 비난하는 성토대회가 성황리에 끝나면 나와 우리를 성찰할 여지는 없어집니다.” 게임만 하는 아이들, 스마트폰에 중독된 아이들을 걱정하기에 앞서 간섭하고 통제하고 제지하고 금지하고 공부만 앞세웠던 어른과 사회의 모습을 반성해야 ‘온전한 해법’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겠으나, 확실한 것은 10대의 SNS 사용과 불안함에 관해 얘기하는 <불안 세대>가 짧은 시간에 높은 판매고를 기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금 우리 사회의 얼굴인 ‘불안한 청년상’이 있다는 사실이다. 2030의 불안감은 점점 실체화되어 겉으로 드러나는 추세다. 2030은 특히 기성세대와 사회 체계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고, 경제 불안과 고용 불안으로 사회적 위기에서 느끼는 시대적 불안감이 크다. 이에 따라 2030 사이에서는 불안한 시대를 견디기 위해 최근까지 ‘갓생’이나 ‘자기계발’ 열풍이 불기도 했다. 교보문고에서 발표한 2023 베스트셀러 동향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종합 1위부터 3위를 차지한 책은 자기계발 에세이 <세이노의 가르침>, <원씽>, <역행자>였다. 교보문고는 부쩍 증가한 자기계발서의 인기에 관해 ‘불확실한 미래 속 자신만의 흔들리지 않는 역량을 기르고자 하는 독자들의 마음’이자 ‘나름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독자들의 적극성’이라고 분석했다. 출판 전문 웹진 출판N에서 일부 선공개된 ‘2023년 하반기 KPIPA 발행 통계 및 심층 분석’에서도 2023년 베스트셀러의 가장 큰 특징을 ‘자기계발서의 전례 없는 약진’으로 꼽았다. 이어서 종합베스트셀러 순위권에서 인문교양이나 문학의 비율이 줄어든 것에 반해 자기계발서가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난 현상에 관해 ‘교양과 지식, 상상력보다는 힘든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실용주의가 출판시장의 거대한 조류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며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출판의 흐름을 진단하기도 했다.
지난해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굳건히 지켰던 <세이노의 가르침>이 올해 상반기에도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무척 놀랍다. 그 외 기존 베스트셀러 <퓨처 셀프>, <역행자 확장판>과 스테디셀러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무삭제 완역본)>, <원씽 THE ONE THING> 등도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다.
반면 신문사 북섹션이 주목한 ‘불안 세대’의 이면은 다름 아닌 ‘불교’ 서적이 2030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2030이 품은 불안한 감정이 자기계발서로 대변되는 실용주의로만 흐르지 않고, 예전 ‘힐링 코드’를 중심으로 했던 필굿 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내면의 구도를 추구하는 ‘불교’라는 돌파구로도 흘러 들어가게 된 셈이다. 독서신문은 며칠 전 기사에서 ‘불교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인기를 상징하는 순간은, 지난 4월 서울국제불교박람회에 승려복을 입은 DJ가 등장했던 순간일 것이다.’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예스24도 마찬가지로 승려복을 입고 디제잉을 하는 ‘뉴진스님’을 불교 유행의 큰 원인으로 꼽고, ‘친근한 스님 캐릭터의 등장이 종교의 장벽을 낮추고 2030세대들이 스님들의 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명료히 했다.
‘이날 불교박람회는 전년 대비 관람객이 3배 이상 모였고, 80%가 2030세대였으며, 이후 이어진 연등회 행사에서 뉴진스님의 공연을 담은 영상은 SNS에서 조회수 1,000만 회를 넘겼다.’ - 독서 신문
채널예스•조선일보•독서신문은 모두 5월에 출간되어 9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오른 <초역 부처의 말>을 화두로, 최근 들어 불교가 2030에게 이례적으로 사랑받는 현상을 북섹션에서 분석했다. 채널예스에 따르면 ‘<초역 부처의 말>은 7월에는 2030 세대 내 판매량이 전월 대비 20.9% 상승’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을 260자로 함축한 경전 <반야심경> 관련서의 올여름(6.1~8.20) 2030 구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31.9% 증가했다.’ ‘소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민음사 출간본은 2023년 전년 대비 2030 독자 판매량이 71.6% 증가한 데 이어 올해 역시 22.8% 상승했고, 문학동네와 문예출판사 출간본 또한 올해 1.4배와 26배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이는 <싯다르타>가 20년 만에 맞는 역주행이라고 한다.
나는 이렇게 자기계발서와 불교 서적이 끄는 인기가 한때 주류를 이루었던 자기계발과 힐링코드 에세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자기계발서와 불교 서적 이외에도 2030에게 재조명된 ‘고전’의 인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에서 벗어나 옛것에서 답을 찾으려는 2030 세대의 몸부림이라고 하겠다.
2030세대 장본인인 나는 저번 주 북섹션을 이상한 기분으로 읽었다. 나는 과연 불안한가?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순 없겠다. 늦여름 더위가 잦아들고 가을이 오면 망중한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