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폈다 덮었다 할 때 600페이지의 무게를 못 견딘 탓인지 양장 제본이 다소 헐거워지도록 책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표지에는 얼룩이 졌고, 마찰 때문에 책등의 모서리가 닳았습니다. 그래도 600페이지의 철학 입문서를 읽는 게 생각보다 마냥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되레 읽으라고 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그 이유를 주저리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1. 개구멍으로 들어가기
『철학의 뒷계단』은 김영사에서 지난달 30일에 발간한 철학 입문서입니다. 원서는 1966년 독일에서 발간된 『Die Philosophische Hintertreppe』입니다. 국내판 제목은 원서의 제목을 직역한 것입니다. 독어 사전에서 ‘Hintertreppe’를 찾아보니 ‘뒷계단, 뒤쪽에 있는 층계’라고 하더군요. 원고는 국내에서 다른 제목으로 여러 차례 발간된 바 있습니다. 1991년 서광사에서 출간한 「철학의 뒤안길」을 시작으로 2004년부터는 여러 출판사를 거치고 개정에 개정을 거듭하며 「철학의 에스프레소」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철학의 에스프레소」는 판권 소멸로 절판되어 더 이상 찾아 읽을 수 없지요. 『철학의 뒷계단』은 마지막 개정판이 출간된지 13년만에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엮은이 후기를 보면 2004년과 2009년, 2011년 개정판까지 번역을 도맡은 안인희 선생님께서 『철학의 뒷계단』이 재출간된 것을 김영사의 덕으로 돌리며 책을 향한 애정을 내보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세 차례나 번역을 맡으셨으니 당연히 원고에 애정이 깃드셨겠지요. 괜스레 감동적입니다.
『철학의 뒷계단』이 국내에서 이토록 연거푸 출간된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출판사에 따르면 『Die Philosophische Hintertreppe』는 독일의 공교육 과정에 쓰일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 온 철학 입문서의 고전이라고 합니다. 방대한 서양 철학사를 34명의 중심인물로 갈무리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풀어냈으니, 과연 학문의 나라라고 불리는 독일에서 고전의 자리에 오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다투듯이 출간되었으니 어찌 보면 내용의 질도 보장받은 셈이지요. 많은 사람이 기존에 출간된 책을 블로그나 SNS에서 벌써 다루기도 했고요. 그러니 여기서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곁들여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철학의 뒷계단』이 방대한 철학사를 요약하기 위해 선택한 길은 철학의 Hintertreppe, 즉 ‘뒷계단’입니다. 저자는 이 독특한 은유를 ‘앞계단’과 비교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철학자를 만나는 앞계단은 ‘양탄자가 놓인 층계를 딛고 반짝반짝하게 닦인 난간을 잡고서 정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엄중한 철학 체계와 낱말을 통해 철학자의 깊은 세계와 직면하는 보통의 ‘정공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뒷계단은 ‘보통은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닙니다. ‘앞계단처럼 밝고 깨끗하고 화려하게 치장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장식 없이 텅 비어 있고, 약간 무심하게 방치되어’ 있기도 합니다. 대신 저자는 뒷계단을 통한다면 ‘화려한 허식이나 고귀한 척하는 과장이 없는’, ‘그들의 본래 인간적인 모습을(<프롤로그 혹은 철학의 두 계단>, 7~8쪽)’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철학자에게 아주 사소하게 여겨지는 부분, 성격과 사생활 등이 철학자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만나게 해주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실제로 각 장의 많은 부분을 철학자의 생애나 성격을 서술하는 데 할애합니다. 가령 소크라테스를 설명할 때는 소크라테스 본인보다 아내 ‘크산티페’에 관해 서술하는 식이지요.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운을 떼며 시작합니다. ‘철학의 뒷계단을 통해 소크라테스에게로 올라간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의 아내 크산티페일 가능성이 크다(45쪽)’. 첫머리에 이어서 저자는 크산티페가 남편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었으며 그 행동이 소크라테스를 만들었음을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집 밖으로 쏘다니느라 집안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크산티페가 그렇게 화를 낸 이유는 그 때문이지요. 소크라테스는 자기에게 모욕을 일삼는 아내를 피해 더더욱 바깥으로 나돌았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니체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니체는 이 점에서도 옳았다. “크산티페는 집을 집 같지 않게 만들어서 그가 점점 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도록 내몰았다”(47쪽)’. 저자는 한동안 소크라테스가 탁월한 신체를 지녔다는 이야기, 전쟁터에 나간 이야기 등을 꺼내며 철학 이야기는 뒤편으로 밀어둡니다. 독자가 자연스레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말입니다. 저자는 그제야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의 면면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하지요. 이것이 바로 저자의 ‘뒷계단’ 전략입니다.
인상적이었던 뒷계단 몇 가지를 더 써보겠습니다.
플라톤의 철학을 다룰 땐 그 유명한 ‘플라톤식 사랑(플라토닉 러브)’로 첫머리를 풀었습니다. ‘오늘날 일상의 대화에서 플라톤의 이름이 나올 때는 대개 “플라톤식 사랑(플라토닉 러브)”에 대해 말할 때다(66p).’
칸트의 ‘이상한 버릇과 행동들’을 언급하는 부분은 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아서 재밌습니다. 칸트가 지닌 특유의 예민한 기질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은 멀리서 보면 희극입니다. ‘새로 이사 간 집이 감옥 바로 옆이었는데, 당시의 관습에 따라 죄수들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종교적인 노래들을 불러야만 했다(330쪽).’
그러나 무엇보다 철학자들의 사생활에서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욕지거리입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완고한 독일 철학자들은 서로 욕을 주고받는 일에 서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식인들이라 그런지, 욕설이 창의적이고 기발하기까지 합니다. 그중 단연코 눈에 띄는 철학자는 피히테입니다. 독일 관념론의 아버지 피히테는 선량한 니콜라이 씨를 향해 <프리드리히 니콜라이의 생애와 특이한 견해들>이란 논쟁문서까지 써내며 온갖 속된 말을 갖다 붙였다고 합니다. ‘니콜라이는 “타고난 둔감한 머리”이고, “진기한 것들을 한데 모아 혼란스런 덩어리로 만든 박식함”을 지닌 “버릇없고 우둔한 수다쟁이”다. “언어의 재능말고 그에게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기”란 어렵다… “문학의 스컹크이며 18세기의 독사라는 운명을 타고난 우리 주인공은 자기 주변으로 못된 냄새를 퍼뜨리고 독을 쏘아댄다.” “개한테 언어와 글쓰기 재능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리고 니콜라이의 뻔뻔함과 니콜라이만큼 긴 수명을 보장해 줄 수 있다면, 개도 우리 주인공과 똑같은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349쪽)’ 피히테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논쟁에도 열렬히 동참했다고 합니다. 이때 피히테가 발표한 논쟁문서의 제목에서 그의 공격적이고 완고한 성향이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사상의 자유를 억누른 유럽의 제후들에게 사상의 자유를 돌려달라고 청구함>
철학에 대한 이런 접근 방식은 지식이 맥락 속에 탄생한다는 점에서 타당하게 느껴집니다. 지식이란 탄생한 시대와 과정을 습득해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소크라테스의 비극적이면서 대담한 최후를 알지 못한다면,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한 서양 철학사의 윤곽을 알지 못한다면,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외고 다닌다 한들 그 말의 무게를 느끼지는 못할 것입니다. 현대는 어느 때보다 무엇이 진실인지 판가름하기 어려운 시기입니다. 정보의 맥락을 읽는 능력은 더욱이 중요해지고 있지요. ‘철학하기’는 그 자체로 비판적 사고를 독려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필요한 것은 각 철학의 줄기가 뻗어 나온 뿌리를 아는 일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어떤 역사를 거쳐 구성된 것인지 깨닫는 일입니다. 저자가 34인의 뒷계단으로 보여주는 철학자의 모습은 사소하고 쇄말해 보일 수 있습니다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 명의 철학자가 지닌 광활한 세계를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 원작의 의도를 고스란히 반영하기
『철학의 뒷계단』은 저자의 집필 취지를 고스란히 반영하려고 다분히 노력한 책입니다. 제목부터 내지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원서의 제목 『Die Philosophische Hintertreppe』를 그대로 옮겨온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입니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인용하며 글을 닫았습니다. ‘그렇다면 내려감도 올라감과 똑같이 철학적이다. 왜냐하면 뒷계단에서도 헤라클레이토스의 수수께끼 같은 말이 맞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 - 같은 길”’ (555쪽). 저자에게 철학이란 ‘올라감과 내려감’입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서른네 번 철학자의 뒷계단으로 올라갔다가 가르침을 가지고 다시 내려오는 과정이지요. 만약 저자가 독자에게 이런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제목 역시 ‘뒤안길’이나 ‘에스프레소’ 같은 창작 제목보다는 원서에서도 쓰인 ‘뒷계단’이란 표현이 조금 더 적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겨온 제목과 다르게 내지에서는 다소 과감한 탈바꿈을 시도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소제목입니다. 국내판에서는 글이 더 쉽게 읽히게 하기 위해 본문에 소제목을 추가해 내용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무척 눈에 띄는 성격과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소제목도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쓰였습니다. 독일 관념론의 아버지 피히테는 ‘정신의 폭력성을 지닌 싸움꾼’,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키르케고르는 ‘지나치게 진지한 우울증 환자’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물론 소제목이 오직 이목을 끌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사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지요. 원서에는 이런 이정표가 없어서 내용이 쉽다고 해도 독자가 이보다 쉽게 읽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존재' 대신 '있음Sein'을 쓴 이유를 설명하는 각주
다음은 조금 논쟁이 될 만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철학의 뒷계단』은 난해하고 복잡하게 느껴지는 기존의 철학 용어 일부를 맥락에 맞게 수정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과감하게 의역한 것입니다. 역자(혹은 편집자)는 ‘아울러 그간 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해 온 용어 일부를 우리말 낱말로 바꾸어 번역했다.’고 일러두었습니다. 가령 ‘존재’는 ‘있음’으로 ‘진리’는 ‘참’으로, ‘존재자’는 ‘있는것’으로 ‘현존’을 ‘여기있음’으로 대체해 표기하는 식입니다. 니체를 다루는 데 핵심이 되는 단어인 ‘니힐리즘’ 내지 ‘허무주의’를 역자는 ‘아무것도아니즘’으로 번역했습니다. 니힐리즘이나 허무주의는 우리에게 나름 익숙한 단어인데도 말입니다. 역자는 일관성 있게 ‘니힐리스트’는 ‘아무것도아니스트’, ‘초인’을 ‘인간너머’, ‘nichts(보통 허무라고 번역되는)’를 ‘아무것도 안’으로 옮겼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조금은 어색한 문장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아무것도안을 통과하며 방황하고 있는 것 아닌가?(484쪽)’. 다소 과감하게 의역했음에도 저는 『철학의 뒷계단』이 ‘철학 입문서’인 만큼 일반 독자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야 하므로 오히려 직역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앞계단이 아닌 뒷계단을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위 사진처럼 역자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의역에는 주석을 다는 등 원어의 의미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썼습니다.
본문을 세세하게 읽다 보면 [대괄호]로 표시된 옮긴이주가 문장 사이에 끼어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옮긴이주는 원서에는 없지만, 국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직접 주석을 달아놓은 것입니다. 이를테면 ‘철학의 역사가 밝아지는 것의 결과가 아니라 어두워지는 것의 결과라면 또 모르지만 말이다(14쪽)’는 문장에서 쓰인 은유 ‘밝아지는 것’과 ‘어두워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국내 독자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옮긴이는 독자가 술술 읽을 수 있도록 ‘밝아지는 것[계몽]’, ‘어두워지는 것[일식]’으로 해석을 덧붙여 표기해 두었지요. 영어를 한국어로 바꾸면서 문맥이 어색해진 경우에는 직접 문장을 보충하기도 했습니다. ‘무상한 것이란, 옛날에 없었고 [지금은 있어도] 앞으로 도로 없게 될 어떤 것이다.(34쪽)’ 또 철학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 특히 한국어로 대체하는 낱말에는 아주 엄밀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966년 처음 쓰인 철학 입문서는 국내에 들어와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독자와 함께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출판사에서 개정에 개정을 거치며 독자에게 더욱 알맞은 모양으로 제 모습을 바꾸어왔지요. 그 이름까지 바꾸어가면서 말입니다. 그 덕분에 저는 새롭게 탄생한 『철학의 뒷계단』을 (그럼에도 조금은 힘들었지만)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겨왔든, 아니면 과감한 변화를 추구했든, 중요한 것은 내지 편집의 방향이 독자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뒷계단’을 이용해 독자에게 철학을 설파하려고 했던 독자의 의도와 꼭 들어맞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음부터는 『철학의 뒷계단』을 둘러싼 바깥의 이야기들입니다.
1. 철학 입문서의 입문서
『철학의 뒷계단』엔 ‘철학 입문서의 고전’이란 별칭이 붙었습니다. 앞표지에 ‘재미와 깊이를 겸비한 철학 입문서의 고전’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철학의 뒷계단』이 말 그대로 고전이라고 부를 만한 세월을 견뎌왔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뒷계단』은 1966년 독일에서 처음 발간된 책입니다. 출간된지 대략 60년이 흘렀지만, 김영사에 따르면 아직 자국민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라고 합니다. 쇄를 거듭하며 ‘일종의 사회 교육과정’을 담당하기에 이른 경지라고요. 철학자들이 내놓은 평생의 저작이 고전으로 거듭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봤다지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 ‘철학 입문서’가 철학자들의 고전과 나란히 놓이는 것은 보기 드문 광경입니다. 또 '《우주의 뒷계단》 《심리학의 뒷계단》 《고고학의 뒷계단》 《영성의 뒷계단》 《양자 도약의 뒷계단》 등 다양한 분야에서 출간된 ‘뒷계단’ 책들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고 하니, 말하자면 입문서의 입문서라고 해야 할까요.
2. 고전 돌풍의 다음 단계
최근 국내 출판 시장에서 인문서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흐름 또한 주목해 볼만합니다. 지난해 출판 동향을 살펴보면 ‘자기계발서’와 ‘고전’이 출판 시장의 주축으로 솟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023 교보문고 연간 종합 순위 10위 내 자기계발서는 네 자리를 석권했습니다. 자기계발 에세이 <세이노의 가르침>, <원씽>, <역행자>가 1위부터 3위에, <김미경의 마흔 수업>이 7위에 올랐지요. 교보문고는 2023 출판 동향 보고서에서 “종합 100위권 내에서도 자기계발 분야는 지난해에는 12종이었는데 올해 15종이 포함돼 관심이 두드러졌고, 상위권에 포진된 것도 눈에 띄었다. 경제경영과 한국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한동안 주춤했던 자기계발 분야 인기가 눈에 띈 한 해였다.”며 자기계발서의 두드러진 성장을 짚기도 했습니다. 자기계발서는 기존에도 국내 출판 시장에서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장르이지만, 작년부터는 더욱 다양하고 넓은 독자층에 읽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작년에는 고전 장르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나란히 인문교양 분야 8, 9위에 자리하며 난데없이 철학 분야의 약진을 보여준 것입니다. <초역 니체의 말>, <마흔에 읽는 니체>도 적잖게 인기를 끌었지요. 교보문고는 고전이 다시 주목받는 현상에 관해 2023 출판 동향 보고서에서 ‘자아성찰적이고 현실을 직시시키는 기조의 철학자’들이 재조명받는 것이라 말합니다. 팍팍한 현실에 지친 독자들이 앞으로 돌파해 나갈 힘과 지혜를 고전의 쓴소리에서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 장르의 발돋움은 자기계발서가 인기를 끈 배경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세이노의 가르침>은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살지를 쓴소리로 알려주는 책’으로, 연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1위를 굳건히 지키며 고전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독자의 열망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른바 ‘고전의 재조명’은 올해 상반기까지 이어졌습니다. yes24 상반기 종합 순위를 보면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이 네 권이나 10위 안에 포진해 있습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1위에, 쇼펜하우어 원저작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와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가 각각 4, 6위에, 니체 원저작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가 9위에 자리했습니다. 채널yes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쇼펜하우어 관련 도서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8.5배(1750.4%) 폭증했다.’고 합니다. 유행에 그칠 줄 알았던 고전 열풍이 작년보다 더 거세진 것입니다.
최근 언론과 학계는 ‘인문학이 사라지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습니다. 여러 대학교가 인문학과 전공을 하나둘씩 폐지하기 시작하자, 인문학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에 염려를 표한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출판의 동향을 보면 기우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출판 전문 웹진 출판N이 ‘힘든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실용주의가 출판시장의 거대한 조류로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 것에 동의합니다. 철학 서적이 많이 팔린다고 철학하는 사람이 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불과 몇 해 전 이른바 ‘힐링 에세이’가 현대인의 도피처가 되었던 때와는 정반대인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자기계발서와 고전 열풍도 마찬가지로 실용주의라는 조류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냥 실용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인문학이 사라지고 있다’는 언론과 학계의 염려가 여전히 타당하다는 말이지요.
저는 실용서에서 시작한 고전의 불꽃이 더욱 깊이 있는 철학 서적으로 옮겨 가게 하는 것이 인문학을 실로 되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철학 입문서의 역할은 더욱 중요합니다. 비교적 최근에는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시리즈가 TV 방송에 노출되면서 인문학, 청소년 분야의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시리즈는 ‘서양 철학사’를 만화로 요약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고전 서적과는 조금 다릅니다. 총 세 권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철학을 얘기하지요. 입문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제작되었기 때문에 입문자가 쉽게 읽을 수 있고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사상의 무게감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시리즈는 만화라서 보는 맛이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벼운 책은 아니니 이런 철학 입문서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의 뒷계단』은 <만화로 보는 3분 철학>의 다음 단계로 보면 좋은 책입니다. 철학사를 입문자가 접근하기 좋게 풀어내는 책은 귀합니다. 만화가 아니라서 보는 재미가 비교적 떨어질 수는 있지만, 서양 철학자 34인의 뒷이야기가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되려 흥미진진한 편이지요. 게다가 ‘철학 입문서의 고전’이라 부를 정도로 오랜 시기를 견딘 스테디셀러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