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박지리, 2012) 서평
나는 ⟪맨홀⟫의 서평을 쓰려고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 의자에 앉은 친구가 물었다. “대체 어떤 이야기이길래 그래?” 나는 ⟪맨홀⟫을 읽으면서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신음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가만히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서 유유자적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감정을 친구한테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친구가 내 감정에 동화되어서 나를 누그러뜨려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책을 여러 차례 읽었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도저히 마땅한 설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정폭력에 희생당한 소년이 방황하는 이야기’? ‘트라우마 때문에 살인자가 돼 버린 소년의 이야기’? ‘구멍에 빠진 소년이 끝내 구원받지 못하는 이야기’?… 어떤 비유와 수사도 내가 겪은 감정을 전부 대변해주지는 못했다. 친구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듯 ⟪맨홀⟫은 단박에 정리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이 애초에 처음과 끝이 따로 쓰여진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가정폭력을 저지른 아버지의 죽음과 이 아이의 살인에는 당최 어떤 인과가 있단 말인가? 집에 와서 곰곰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하나의 답은 ‘모르겠다’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으면 행복만 가득할 것만 같던 가정이 왜 이토록 불행해졌는지.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했던 주인공이 어째서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모르는 엉뚱한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지… 주인공조차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는 캄캄한 구멍 그 자체라고 말한다.
확실한 것은 ⟪맨홀⟫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청소년 소설’이라는 점이다. ⟪맨홀⟫이 주는 감정은 지나치게 매섭고 선득한 면이 있어서 ‘청소년 소설’이라는 딱지와 완전히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 소설은 대개 이토록 어두운 인간의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특히 ‘살인을 저지른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만큼 기존의 청소년 소설은 청소년에게 비정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청소년 소설이 비행과 폭력, 그리고 살인을 동원하면서까지 청소년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 이 책을 이해하는 것의 출발점은 청소년인 ‘주인공’ 일 테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아무도 하지 않은 질문을 주인공에게 던져야 한다. 주인공은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는가.
지상 세계의 이방인
맨홀은 지상의 오물 찌꺼기가 모여들어 흐르는 구멍이다. 그런 맨홀은 주인공에게 뜻깊은 공간이다. 맨홀은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누나와 주인공을 숨겨 주고 강아지 ‘달이’를 만나게 해 주었으며, 주인공이 처음으로 좋아했던 여자 아이와 첫 키스를 나누는 추억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맨홀은 주인공에게 은신처이자 아지트이고, 아버지의 폭력 대신 사랑이 머무르는 진짜 ‘집’인 셈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맨홀에는 점점 ‘오물’이 흘러들기 시작한다. 처음엔 주인공이 혐오하는 아버지의 상패가 맨홀 안으로 들어왔고, 나중에는 자신이 죽인 사람의 시신마저 맨홀에 버려지게 된다. 그리고 시신이 맨홀에 유기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마지막에는 구청에서 나온 사람들이 맨홀 입구를 원천 봉쇄해 버리기까지 한다.
사실 맨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의 끝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맨홀을 지배하는 것은 ‘우연성’이다. 낙엽이든 담배꽁초든 진창이든, 비가 오면 마구 뒤섞여서 흘러 들어가는 곳이 바로 맨홀이라는 공간이다. 맨홀은 주인공 남매와 달이, 아버지의 기억과 죽음까지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다. 달리 말하면 맨홀은 주인공의 삶을 모조리 우연성이라는 암흑 속에 밀어 넣어 버린 것이다.
이 맨홀의 거주자인 주인공은 지상 세계의 이방인이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가정폭력의 가해자이자, 화재 현장에서 16명을 살리고 순직한 영웅 소방관이다. 주인공은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성장하지만, 정작 그 복수 대상은 자신의 바람과 다르게 세간의 영웅이 되어 명예롭게 죽는다. 주인공은 이 모순적인 두 가지 사태를 봉합하지 못한다. 세상은 물론, 같은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엄마와 누나까지 이 간극에서 도약한 순간부터 주인공은 지상의 이방인이 된다. 그때부터 주인공의 맨홀은, 지상과 철저하게 격리된 공간으로서, 혹은 삶의 오물 찌꺼기가 모여드는 현실로서 주인공의 삶과 동일시된다. 주인공이 앞으로 청소년으로서 살아내야 할 거대한 삶은 주인공에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맨홀⟫은 결국 ‘이방인’이 된 청소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세계를 보여 준다. ‘이해할 수 없는 삶’ 안의 인간에게 최대로 허용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일 것이다.
(이 대목은 실제로 프랑스 소설 ⟪이방인⟫을 여러모로 생각나게 한다. 이방인 뫼르소가 햇빛 때문에 우연히 남을 죽이게 되고, 주인공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재판이 이루어지는 장면까지, ⟪맨홀⟫은 ⟪이방인⟫의 청소년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아 있다.)
잠식당하는 소년들
그렇다면 출간된 지 13년이 지난 이 청소년 소설을 지금 다시 꺼내 보아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
그사이 세상은 말 그대로 천지개벽했다. 2012년은 스마트폰이 막 보급되던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영화 ⟪아이언맨⟫ 속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가 각자의 손안에 들어오는 세상을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2025년 현재,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인공두뇌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상천외한 일은 또 있다. 종식된 줄 알았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 가자 전쟁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두 차례나 탄핵되었다는 것. 남성과 여성 사이에 다시는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 생겼다는 것. 학생과 청년들이 무고하게 세상을 뜨는 비극들이 있었다는 것. 그 결과 한국은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자체 소멸을 앞둔 나라가 되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곧 인간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은 토양이라는 뜻일 테다.
지난 13년은 그야말로 인간과 제도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는 고해의 기간이었다. 지금 시대에는 폭력과 허무 사이에서 자라나는 불안이 우리의 주인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이 와중에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속죄할 일이 많다. 오늘날의 거대한 시대적 불안과 비극은 신세대가 고스란히 감당하게 될 것이다. 며칠 전에 미취학아동의 정신 건강 보험 가입 수가 4년간 2배 이상 늘었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소년도 되지 못한 아이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셈이다.
시대가 공유하는 불안의 진폭이 어느 때보다 커진 지금, 이 소설은 인간 존재에 새겨져 있는 ‘구멍’을 다룬다는 점에서 다시 꺼내 볼 만한 이야기다. 구멍은 단지 ‘상처’나 ‘트라우마’로 치환되는 무엇이 아니다. 구멍은 그보다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체험되는 삶의 오물 찌꺼기가 모여드는 현실 그 자체다. 이 구멍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현실이 어떤 면에서 비극이고, 불가해한 슬픔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일원인 청소년은 ‘구멍’을 마주할 권리가 있다. 아니, 오히려 마주해야만 한다.
단순히 ‘청소년에게 적합한’ 이야기를 쓰는 것만으로 우리가 청소년을 올바르게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은 어른의 오만일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에게 ‘적합한’ 이야기가 아닌 ‘의미 있는’ 이야기만을 전달해야 한다. 어른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주제의 이야기는 정작 독자인 청소년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맨홀⟫은 반대로, 겉으로는 청소년에게 ‘부적합’하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실은 청소년기에 특히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청소년은 성장기의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민들이 느끼는 시대적 아픔을 동시에 겪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성장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맞설 때 일어날 것이다. 기성세대와 달리 청소년은 늘 낯설고 새로운 길을 창조해 낸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청소년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일뿐이다. 우리가 청소년을 어리고 약한 존재로 볼수록 그들의 사고는 더 정형화될 수밖에 없다. ⟪맨홀⟫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맨홀처럼 파고들면서 청소년 독자에게 또 다른 삶의 형태를 보여 주었다. 이것은 여태껏 어떤 청소년 소설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다만 우리에게 청소년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던 박지리 작가의 작품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우리 사회는 삶의 구멍을 외면한 채 꿋꿋이 소멸의 길로 들어섰다. 마치 ⟪맨홀⟫의 주인공이 지상의 세계에서 이방인이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점점 인간이라는 세계에서 이방인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에게 눈 가리고 아웅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맨홀의 암흑을 직시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이 소설은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기에 지나치게 어둡다는 오명을 받는 소설을 다시 꺼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