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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Dec 10. 2022

예술 혹은 외설

시대 감수성에 공감한다는 것

물건들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 시대, 패션은 더 이상 필요에 의해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패션산업은 인간의 사치 취향과 욕망을 자극하며 성장해왔다. 누군가를 흉내 내고 싶은 모방 심리와 군중으로부터 구별되고 싶은 차별화의 욕구를 줄타기하는 인간의 그 모순되고 복잡 미묘한 욕망 말이다.


패션계의 상품 주기는 매우 짧아졌고, 새로운 상품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때문에 패션 브랜드들은 PR과 마케팅 등 일련의 패션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통해 소비자를 유혹하고자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과열된 경쟁 속에서, 패션 브랜드들이 소비자의 이목을 잡아끌기 위해 더욱 파격적이고 과감한 이미지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려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소비자의 관심을 1초라도 더 사로잡고 소비 욕구를 더욱 부추기기 위해, 오래전부터 패션 브랜드들이 행했던 가장 쉬운 방법은 도발적인 이미지로 말초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주제는 '섹슈얼리티'이다. 노출, 성적인 표현, 포르노그래피나 성범죄를 연상시키는 광고 이미지.


40여 년 전, 프랑스 사진작가 기 부르댕(Guy Bourdin)이  슈즈 브랜드 찰스 주르당(Charles Joudan)의 광고를 통해 선보였던 이미지는 확실히 도발적이었다. 과감한 컬러와 더블 스프레드 구도는 매우 신선했으며, 성적인 은유가 가득했다. 과도한 노출이 허다했고 살인이나 죽음 등을 연상시키곤 했지만 오히려 '포르노 시크'라는 장르를 개척한 '어두운 천재'로 칭송받았다. 그 시대에는 그랬다.


1970년대 Guy Bourdin이 촬영한 슈즈브랜드 Charles Jourdan의 광고 이미지들 (출처: vogue.fr ©The Guy Bourdin Estate)


패션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목표는 소비자로 하여금 브랜드에 대한 환상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아하거나 파격적이거나. 또는 현대적이거나 고전적이거나. 패션 커뮤니케이션은 브랜드가 만들어낸 기호와 상징에 소비자가 지갑을 열도록 만든다.


캘빈 클라인(Calvin Klein)은 수십 년간 일관되게 '섹슈얼리티'를 강조해왔다. 왜냐면 언제나 잘 팔리니까.

'당신이 이 상품을 소유한다면, 광고 속의 모델처럼 강렬한 성적 매력을 발산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문을 건다. 벌거벗은 채 뒤엉킨 젊은 남녀 모델을 내세운 광고 이미지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니, 이쯤 되면 '섹스'는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자 브랜드 아이덴티티, 기업의 철학이라 해도 되겠다. 


GUCCI(2003)와 Calvin Klein(2016)의 선 넘은 표현. 성을 이용해 관심 끄는 건 하수 아니냐?




문제는 창의적 표현이라는 기치 아래, 종종 선을 넘는다는 것이다.

예술인지 외설인지 모를 아슬아슬한 표현들이 누군가에게 수치심과 혐오감을 준다. 혹은 모방에 의해 자칫 사고와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자극에 계속적으로 노출된 패션계 고인물들은 둔감해져서 판단이 흐릴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패션 광고 이미지가 게재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거나 세간을 발칵 뒤집어 놓는 일들이 발생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미지 하나를 만들어내기까지 연루된 수십 명의 업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거나 묵인했던 것이다.


패션은 원래 이런 거야! 자유로운 표현으로 해방감을 누리자!


2016년 남성잡지 맥심(Maxim)의 표지에 실렸던 이미지는 영화에서 보아왔던 전형적인 범죄 장면과 같다. 그런데 패션계 혹자는 여자의 발목을 결박한 것이 청 테이프가 아닌 샤넬 핸드백의 체인이었더라면 그냥 패션 화보였을 것이라 변명한다. 패셔너블하거나 더 미학적이었다면 논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콘텐츠보다 형식이 문제라는 그 궤변에 공감할 수 없다.


지난 11월 25일 게재된 코스모폴리탄의 슈즈 화보는 몰카인지 패션 화보인지 분간이 안 간다.  

지하철 승강장과 공공 화장실 같은 공간에서 은밀하게 엿보는 듯한 앵글. 슈즈 화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관련된 수십 명의 사람들은 이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문제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다!


맥심 표지 화보(2016)와 코스모폴리탄 슈즈 화보(2022). 수십 명의 관련자들은 이게 문제 없다고 생각했을까?




최근 발렌시아가의 광고 이미지가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하네스로 결박된 테디베어 인형 모양의 가방 광고에 아동 모델이 등장해 비난을 받았다. 도발적인 제품 디자인은 그렇다 쳐도, 그걸 하필이면 아동에게 들도록 해 아동 포르노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2023년 봄 상품인 가방 광고 이미지에 소품처럼 등장한 서류 중 아동 성착취물 매매에 관한 미국 대법원 판결문이 포착되었다. 또 다른 광고 이미지의 소품에는 피투성이 아동 이미지를 오컬트적으로 표현한 Michael Borremans의 작품집이 놓여 있다.


현재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며 발렌시아가 불매에 동참 중이다.

개인적으로 과거 발렌시아가에 적을 두기도 했었고, 이 브랜드의 신화를 애정 하는 소비자로서 발렌시아가의 어처구니없는 행보가 너무나 안타깝다. 우연이라 믿고 싶지만, 우연이 여러 번 반복되면 더 이상 우연이라 볼 수 없다.


패션계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기 이전에 시대의 감수성을 읽어내는 것이다.


테디베어 가방을 들고 있는 아이(2022 FW),  가방 밑  미 대법원 판결문(2023 SS), 창가에 놓인 작품집(2023 SS). 발렌시아가 왜 이러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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