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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Mar 06. 2021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길을 걷다가 삐끗했다. 사거리였다. 느긋하게 걷는 중이었다. 여름이었다. 킬힐은 아니다. 한때 힐만 신던 때가 있었다. 오늘은 다행히 샌들이었다. 굽 높이가 7센티쯤 될까. 뛰지 않았다.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런데 발이 꼬였다. 길이 꼬였다. 꼬인다는 건 불만이 있다는 증거다. '혹시 나는 이 길에 불만 있나?' '이 길이 나에게 불만 있나?' 누구의 불만인지는 중요치 않다. 불만이 문제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 한가운데서 태클을 당한 거다. 다른 사람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태클을 당했다. 그럼 나에게 문제가 생긴 거다. 전 같으면 이런 일쯤 그냥 별 탈 없이 넘어갔다. 길가다가 넘어진 게 이번만은 아니다. 전에도 여러 번 넘어진 적 있다. 그럴 때마다 병원을 가진 않았다. 그냥 먼지 묻은 옷만 털면 됐었다. 신발이나 발을 툭툭 털면 그만이었다. 순발력이 떨어진 걸까? 지금은 살짝만 삐끗해도 그냥 넘어가지지 않는다. 


  길은 나에게 상처를 넘겨준다.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난 세월에 지고 있다. 나이에 발이 지고 있다. 조금만 삐끗해도 병원에 가야 하거나 한의원에 가야 할 정도로 발이 약해졌다. 한번 다치면 자꾸만 다치게 된다. 별게 다 전염된다. 한번 다쳤던 발은 약해져서 다음에 다쳐서 보면 또 그 발이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엎친데 덮친다고 오늘은 일요일이다. 절뚝이며 걸어 나왔다. 창피를 무릅쓰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샌들은 말짱했고 발이 살짝 부었다. 샌들은 다시 신을 수 있었다.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응급실 갈 정도가 아닌 것에 감사했다. 응급실은 진료비가 비싸다. 추가 비용이 든다. 다음날 가도 될 것 같았다. 얼른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갔다. 발은 뾰로통한 아이처럼 퉁퉁 부었다. 통증이 다. 진통제 한알을 챙겨 먹는다.


   '내일까지 버틸 수 있겠지' 빨리 내일이 오기를 기다린다. '내일이 왜 이렇게 멀지?' 시계를 보며 짜증을 낸다. 내가 언제부터 내일을 이렇게 기다려 봤던가? 그런 적은 없었다. 내일이 온다는 것은 나의 시간이 줄어드는 일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하루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일이 빨리 안 온다고 투정을 부리는 중이다. 내일이란 단어가 이렇게 절실한 적은 없었다. '내일을 기다려 본 적 있나요?' 물어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중간에도 발을 점점 부어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절뚝 걸이며 출근했다. 다들 다리 왜 그러냐며 한 마디씩 보탠다. 오전 근무는 바빴다. 발 핑계로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안다. 오후 서너 시쯤 되자 여유가 생겼다. 진료를 보러 갔다.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가 말한다. '살짝 금이 갔는데 심하진 않다.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찜질하고 당분간 보호대를 하고 다니면 괜찮을 거라며 처방을 해준다. 물리치료실 가서 찜질을 했다. 일 안 하고 누워 있으니 좋다. 배 위에 따끈한 찜질팩을 올려놓으니 세상 참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다. 다리 아픈 건 둘째다. 

  

  치료가 다 끝나자 현실이 다가왔다. 따끈하던 등짝도 따시던 배도 다시 차가워졌다. 찜질이 끝나자 석고실로 향했다. 깁스를 했다. 연속극에서 자주 보던 파란색은 아니다. 여기 그런 색은 없다. 이 상황에 파란 깁스나 찾고 있는 내가 우습다. 깁스를 하고 커다란 슬리퍼에 발을 담고 걷는다. 깁스를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가를 냈다. 그런 발을 끌도 다니며 근무하는 것은 동료들에게 피해다. 차라리 쉬는 편이 났다. 일주일을 집에서 보냈다. 거실 소파에 누워 리모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깁스한 발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깁스를 하고 누워있으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눈에 띈다. '우리 집에 먼지가 저렇게 많았었나?' 잊고 살았던 먼지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일까?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먼지다. 하필이면 발도 움직이기 불편한 지금, 이 순간에 그것이 나의 시선을 압박하는 것일까? 조심조심 발을 옮겨가며 먼지를 닦는다. 되도록이면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움직이고 있다. 먼지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김광석 노래다. '내 조그만 공간 속에 추억만 쌓이고'가 아니라 먼지만 쌓이고 가 된다. 여기저기 부피를 키운 흔적이 많다. 내가 저렇게 먼지를 일으키며 살고 있었구나. 새삼스럽다. 먼지를 일으킨 것은 나고 먼지를 없애는 것도 나다. 우린 한 공간에서 같이 살고 있다. 한쪽은 먼지로 한쪽은 인간으로 산다. 깁스를 하고 있으니 생각나는 화가가 있다. '프리다 칼로'다. '발, 만약 내가 날 수 있는 날개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왜 좋아해야 하는가?' 프리다 칼로는 상처가 깊다. 기구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특히 다리 절단은 그녀로 하여금 평생을 누워 지내게 만든다. 휠체어에 기댄 그의 삶은 어쩌면 화가로 나가기 위한 화려한 발돋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발을 다쳐보니 발의 소중함을 알겠다.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혹시 나는 내 발에게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는지 물어본다. 조심조심 그의 눈치를 볼 일이다. 길 가다가 넘어지지 않게 그를 살필 일이다. 나의 체중을 받쳐준 이가 바로 발이었다. 두껍다 가볍다 짜증 낸 적 없다. 오히려 깁스한 발을 보며 내가 퉁퉁거리고 있다. 먼지를 닦아내며 마음에  때도 벗겨나가면 좋겠다. 


  오랜 길을 발과 함께 걸어왔다. 발과의 동행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발은 길을 만들고 길은 발자국을 만든다. 발자국이 나를 만든다. 순례자가 아니면 어떤가? 산티아고가 아니면 어떤가? 동네 골목길이라도 좋다.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으면 된다. 걸어가는 발걸음은 혼자가 아니다. 나도 걷도 발도 걷는다. 따로 또 같이 걷는다. 금방 그런 날이  걸 믿는다. 깁스는 이주일 만에 풀었다.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날개를 파드닥 거리며 훨훨  세상으로 날아갈  가볍다.  맨발이 드러나는 날, 문태준의 시 '맨발'을 읊조려 본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 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캄캄한 깁스 속에서 나의 맨발도 울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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