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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SHOOP 리슙 Oct 03. 2023

서운함에 대하여



나는 서운한 동물이다. 그렇게 태어나 자라다. 초의 서운함은 기억도 못할 울음일 테고 엄마가 세의 전부였던 시절일 테다. 라고 부를지도 몰랐던 막막 느낌을 인지하부터 차츰 의 서운함 감. 그이의 서운함은 우연히 경우와 하여 알게 되 가 있다. 두 가지 모두 천성이 미치는 향력이 .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에서 순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더 이상 안 들은 지는 오래이). 고난 지순 덕에 타자의 감정을 남들보다 기민하게 파악했을 . 사람은 보통 날카로워지거나 화 상대방의 감정있는 그대로 보기 어려울뿐더러 아예 헤아릴 생각조차 지 않는다. 그에 반해 순한 성향은 화가 끓는 지점이 평균보다 높아 주변 상황과 다른 감정을 읽 여력이 다. 동시에 타자를 향 쌓이는 서운함 지수 높. 나는 당신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만큼 당신의 눈치를 살피고 헤아리고 물어보는데 정작 나는 그만큼 받지 못해서이다.


마음속에 섭섭함과 억울함과 실망이 한데 뭉뜨그려져 거대한 퇴적을 이다. 어릴 적 아무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던 순함을  커서도 칭찬받고 싶 의도적 노력다. 간힘을 써 감정을 외면하고  참다. 도구는 왜곡이다. 먼저 자신부터 속다. 모든 걸 이해한 척 수긍한 척다. 그래야  혼나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고 뭐가 힘드냐고 부정당하지 않다. 자신을 뺀 나머지를 받아들이면 모든 게  평화롭게 유지될 거라 믿다. 맹목적인 믿음으로 주조한 착각은 마음속에 영원한 전쟁을 일으다. 의심하면 죄가 될까 두려워 화와 부당함을 눌렀다. 반사작용으로 서운함과 억울함이 튀어나다. 자기 부정과 원한도 같은 곳에서 태어다.

얽히고설킨 나의 서운함은 형제가 많고 유서가 깊다.




서운함이 부끄러웠다. 서운함을 느끼는 내가 부끄러웠다. 못나서 느끼는 줄 알았다. 서른이 넘어서야 정당한 반문이 일었다. '왜 나는 서운함을 느끼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서운함은 반성하고 감춰야 하는 감정인가?' 그동안 착실하게 돌아가던 왜곡이 일순 정지했다. 누굴 위해 반성해야 하지? 힘든 감정으로 힘든 건 나인데 왜 나만 억눌러야 하지? 내가 가진 감정은 내가 먼저 신경 써야 했다. 조건 반사적 반성 따필요 없었다. 다른 식으로 대했다면 덜 층졌을 나의 마음이었다. 서운함도 기대감도 모두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이렇게 스스로의 서운함과 형제들을 인정하니 마음이 차츰 평안해졌다.

다음으로 판단을 중지했다. 서운함에 매몰된 나머지 상대방을 배신자 혹은 악마로 만들기 전에 멈췄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의 저자 나티코는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고요함 속에서 다시 볼 때까지는 일단 판단을 보류하라는 그의 말을 지키고자 열심히 다른 짓을 했다. 넷플릭스를 보거나 맛있는 걸 먹거나 러닝을 나갔다. 명상도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나를 다른 각도로 옮겨놓았고 '그럴 수도 있지'라는 판단과 만나게 해 줬다. 간혹 서운함을 느끼게 한 상대가 먼저 다가오는 행운도 누리게 했다. 서운함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지니 많은 것이 나아졌다. 근래 만들어졌던 퇴적층 하나도 그렇게 사구처럼 사그라졌다.



제법 오랫동안 알고 지낸 A와는 일 년에 다섯 번 정도 만나는 사이이다. 연락하는 시기도 비슷하다. 어쩌다 한 번이다. 어릴 적에는 불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다들 저마다 바쁘니까 존중이 필요하다. 또 서로의 마음도 다르고 그동안 A에게 받았던 고마움도 잔뜩 있다. 그러다 여름 즈음 견디기 어렵게 마음이 복잡했고 누군가에게 꼭 토로하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다. 메신저든 전화든 30분 정도의 대화가 절실했다. 머릿속으로 할 말을 그리며 이례적으로 A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의외로 금방 답장이 왔다. 두세 번 더 주고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긴 침묵. 예전에는 하루 이틀 뒤 답장이 와도 그러려니 했을 거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그만큼 괴로웠다. 세고 싶지 않았던 5시간이 지나갔다. 함께 지내 온 시간이 떠올랐다. 네가 힘들었던 때 최선을 다해 곁에 있었다고 믿은 나의 오만함 원망스러웠다. '내가 서운하게 해서 나를 서운하게 하나 보다'. 아니면 그때 순수하게 위로하지 못하고 '너도 나처럼 나중에 내가 힘들 때 위로해 줘야 돼'라 금이라도 대했었나 보다, 보같이. 꼬리에 꼬리를 문 자책이 이어졌다. 사실인지 오해인지 구별 안 되는 생각들이 서운함으로 치밀어 올랐다.


일단 떨어지자. 실제 사실마저 뒤덮이기 전 신속하게 생각의 바다를 빠져나왔다. 판단을 정지한 뒤 다른 일을 하며 타이밍을 기다렸다. 할 거는 많았다. 무한도전을 봤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먹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리웠던 고요한 손님이 찾아왔다. '내가 틀렸을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관용은 나의 서운함과 친구 모두를 받아들이게 했다. 덕분에 대답을 기다리던 나의 메시지 밑으로 한 개의 메시지를 더 보낼 용기도 낼 수 있었다. '많이 바쁜가 보구나! 담에 연락하자 잘 지내~'. 더 이상 답장이 없어도 편안했다.




언제나 서운함은 첫 번째 감정이 될 수 없다. 두 개 이상의 감정과 일정 시간을 거쳐야 만들어진. 그 과정에서 서운함은 오염되기 쉽다. 오해가 섞이면 서운함은 더욱 난해해진다. 서운함이 변질되기 전 해야 할 필수 조치를 취한다. 자신이 느낀 서운함부터 가만히 바라본다. '그래, 참 서운하네.' 인정한다. 행여나 머릿속 누군가가 '그런 걸로 삐지고 그래'라는 같잖은 말을 하려고 하면 멱살을 잡는다. 내가 내 마음을 그렇게 느낀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쫓아낸다. 서운함은 알고 보면 증거이다. 마음과 정성을 들이지 않았으면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이든 전혀 느끼지 못했을 흔적이다. 좋아했으니까 서운한 거다. 노력했으니까 서운한 거다. 좋아한 만큼 서운다. 자신은 서운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관계를 지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는 자이다. 손절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거나 여태껏 포기하고 회피하고 살아서 정중한 이별을 해본 적 없는 자이다. 혹은 당신에게 더 이상 애정이 없거나 처음부터 없 상태일 수 있다. 지하철 칸에 함께 탑승한 사람들에게 어떤 서운함도 관심듯이 말이다. 나는 서운함을 느껴보고 괴로워한 적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서운함을 느낄 용기가 있는 사람이 좋다. 서운함은  다게 태어난다. 얘기해야 풀리는 서운함도 있고 시간이 지나 저절로 풀리는 서운함도 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경우도 있 이외에 다른 조치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다만 어떤 조치든 최소 반나절 정도의 시간, 생각에서 한 반짝 떨어지고 감정을 관찰할 시간은 확보하자. 서운함이 생기는 연유와 과정은 부끄럽지 않다. 우선 관찰한 다음 푸는 방법을 자.


나의 서운함은 용기와 관용을 알려줬다. 유서 깊은 서운함은 나의 자랑 힘이다.






일주일 뒤  A에게서 연락이 왔다.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는 사진과 따뜻한 몇 마디가 담겨 있었다. 서운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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