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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새 Dec 05. 2022

어쩌다 보니 극성엄마가 되었다.


“오빠. 나 무통주사 맞으면 안 되나?

제발 좀! 내 죽겠다고!”

흐느끼며 애원했다. 30년 가까이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간절한 적이 없었다.

무정한 남편은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이 될 뻔했다.

가끔 TV에서 보지 않는가.

출산 장면에서 남편 머리채를 옴팡지게 쥐어 잡고 흔드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 말이다.

24시간 가까이 먹은 것이 없어 허기가 져있어 힘이 없는 손은 남편의 머리채 대신 남편에게 잡힌 체,

 내 몸을 짐볼의 출렁임에 맡겼다.

어쩌자고 내가 자연주의 출산을 한다고 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렇다. 나는 자연주의 출산을 했다.

이렇게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묻는다.

“자연분만이랑 다른 거야?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출산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질문에는

명쾌하게 대답하기가 힘들다.

내 나름대로 정리한 바를 간단히 말하자면,

최대한 출산의 과정을 어른과 의료진 중심에서 태아 중심으로 환경을 맞춰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태아 중심으로 환경을 맞추기 위해서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에서 유도분만 주사나 무통주사도 되도록 지양(止揚)하고 산모가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그게 아기에게 좋단다.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어느 추억이 그러하듯 자연주의 출산도 아주 좋은 추억이 되었으나,

둘째를 그렇게 낳을 것이냐 묻는다면 단호히 못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



태어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 배 위에서 태변을 시원하게 보고 3.92kg을 찍었다.

아깝다! 똥만 안 쌌으면 4kg 찍었을 건데.

남편 놈이 탄식했다(그땐 진짜 놈이었다).

눈 뜰 힘도 없어서 속으로 욕했다.

거의 4kg인 우량아는 뭐가 그리 마음이 급했던 것인지, 진통이 시작되고 6시간 동안 쉬는 틈을 안 주고 내 골반을 강제로 열고 내려왔다.

3.92kg를 자연주의 출산으로 낳은 나의 유연한 골반뼈는 황금 골반으로 추앙받았다.

퇴원 후 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자연주의 출산한 후기로 강연을 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이래저래 힘들었지만 그때는 그런 나 자신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도 된 것처럼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100만 원!

고생스레 낳은 딸에게는 100만 원도 아깝지 않았다. 비록 나는 젊은 나이 믿고 돈 아낀다고 산후조리원도 가지 않고 친정엄마 등골 빼먹으며 친정에서 몸조리했지만, 황금 골반으로 낳은 내 ‘목숨’과도 같은 딸에게는 100만 원짜리 문화센터도 아깝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무통주사로 천국을 맛보았다는데 나는 강렬하고 5분도 쉴 틈 없는 고통 속에서 저승사자랑 하이파이브하고 왔다.

그러니 내 목숨 같은 딸이라는 건 과장 없는

사실이라 생각했다.

내 목숨에게 100만 원이 무에 아깝겠는가.

문화센터는 아기의 오감을 자극하고 발달시켜줄 수 있는 이중언어 환경을 만들어주는 커리큘럼이었다. 내 아이가 영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는 말에 혹해서 100만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

임신하고 외벌이가 된 우리 가정에는 결코 적지 않은, 사실은 매우 큰돈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계좌이체로 바로 시원하게 문화센터로 거금을 상납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백일도 안된 아이를 안고, 30분간 지하철에 몸을 실어서 문화센터에 갔다.






나도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

게으름 피우기 세계대회가 있다면 적어도 국가대표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나다.

지금은 집 앞 마트에도 나가기 싫다.

오죽하면 올 초에 코로나19에 걸려서 격리되었던 일주일도 나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집에서 빈둥거리기는 아무리 둘러봐도 내 주위에서는 내가 최고다.

그런 내가 어떻게 갓난쟁이 육아와 교육에 열정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느지막이 가지게 된 둘째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하라고 해도 그렇게 못한다.

자연주의 출산도, 100만 원짜리 고급문화센터도 전부 게으름뱅이가 쉽게 마음먹고 실천할 수 있을 만한 성격의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나라는 게으름뱅이가 마치 맹모(孟母)에 빙의된 것처럼 행동했다.

아마도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자연주의 출산은 뭐고, 이중언어문화센터는 뭐야?’

‘저 젊은 아기 엄마 너무 극성이네.’

그렇게 나는 어쩌다 보니 극성 엄마가 되었다.





그림 출처: 픽사베이, 내 핸드폰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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