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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새 Dec 05. 2022

나의 생명줄, 그림책과 모래놀이세트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장마였다.


    

겉으로 보기엔 잠이 부족한 여느 아기 엄마였다. 그러나 마음속은 길고 긴 장마처럼 음습하였고 배수(排水)되지 않은 빗물이 고여있었다. 곰팡이같이 피어난 괴로움과 죄책감은 애써 덮어놓고 외면하려 할수록 더 크게 번져갔다. 산후우울증이었다.     



부족한 부모였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새벽에 나가서 저녁 늦게 퇴근하는 남편 덕분에 독박육아 당첨이었다. 온종일 나에게 의존하는 아기를 보살핀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때때로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부사이에 정다운 이야기 한마디 주고받기도 요원했다. 14시간 만에 들어온 남편을 맞이하는 것은 정돈되지 않은 물건과 우는 아기, 그리고 무표정한 아내였다. 부부싸움은 잦아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외쳤고, 그것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나 너무 힘들어. 나 좀 도와줘.     



잠을 잊고 뺙뺙 울어대는 아기, 부부싸움으로 인해 바위처럼 무거워진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장마는 지난하게 계속되었다. SNS 속 지인들의 모습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왜 나만 육아가 이렇게 힘들까? 왜 아이가 사랑스럽지 않은 걸까? 목숨 걸고 낳은 아이지만 탯줄을 자르자마자 타인이 된 아이와 항상 붙어있는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수인 내향인에게는 무척이나 버거웠다. 아기발달에 좋다는 것은 열심히 검색하고 해주었다. 영어동요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공기 중에 흩어졌다. 바쁜 하루 속에 나는 없었다. 창밖엔 청랑(晴朗)한 하늘이 보였다. 저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다. 문득 든 생각에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산후우울증이라는 장마는 눈물 한 방울마다 빗물이 되어 마침내 홍수가 되고 말았다.     




살고 싶다. 삶에 대한 갈망이 솟구쳤다. 홍수에 잠겨 쓸려가기 전에 몸을 의지할 나무판자라도 붙잡아야 했다. 긴박한 그 순간 나는 그림책이라는 뗏목을 붙잡았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림책은 한글이든 영어든 상관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줬다. 책은 유일한 취미이자 오랜 친구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책은 금세 우리 삶 속에 스며들었다. 어디든 그림책을 들고 다녔다. 아이에게 책은 장난감이었다. “아들이 본 책인가 보네요. 이건 그냥 재활용장에 버리세요.” 중고책 매입자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씹고 뜯고 쌓고 무너뜨리며 가지고 논 새 책은 중고책 매입자가 딸을 아들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걸레짝이 되어 재활용장으로 직행했다. 아이가 책으로 험하게 놀아도 개의치 않았다. 늘 혼자 놀면서 자란 터라 나는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을 몰랐다. 인터넷으로 찾은 촉감놀이도 겨우했다. 그것은 아이를 위해 해야만 하는 과업이었다. 나는 즐겁지 않은 과업. 그러나 책읽기는 내 친구를 아이에게 소개시켜주고 함께 노는 과정이었기에 즐길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책육아를 시작하게 되었다.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한다. 그림책이 몸을 띄워주는 나무판자였다면 2천원짜리 모래놀이세트는 물살을 가로지르는 노가 되었다. 걸음마를 시작하고 난 후, 모래가 있는 놀이터로 향했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모래가 있는 놀이터를 찾아다녔다. 바다가 가까워 바다에 가기도 했다. 공주 드레스를 입고 킥보드를 타고 공원에 가더라도 모래놀이세트는 들고 갔다. 치맛자락을 둘둘 말아서 묶고 퍼질러 앉아서 모래놀이를 했다. 아이는 모래놀이를 하면서 촉감놀이를 실컷 하고, 나는 그 참에 콧바람을 쐬며 바깥세상 구경을 했다. 모래가 속옷 속,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들어갔지만 기분만은 산뜻했다. 아이 몸에 붙은 모래를 씻겨내면 곰팡이 같던 우울감도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림책 뗏목을 타고 모래놀이세트 노를 저어서 산후우울증이라는 긴 장마와 홍수를 이겨낼 수 있었다.

마침내 하늘이 맑게 개었다.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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