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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새 Dec 06. 2022

하우스푸어(housepoor)와 핸드백

육아날씨 맑음.

장마처럼 젖어들었던 우울증을 보내고,

여전히 그림책과 모래놀이 장난감을 들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누비고 다닌 어느 날이었다.

집주인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계약 연장을 앞두고 전세금을 더 올려달라고 하는 말.

그 사실을 남편에게 알렸다.

“그게 말이가, 빵구가?”

직역: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혹시 그 할머니 입으로 방귀 뀌신 건 아니지?

의역: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올려달라는 전세금도 없었지만 전세살이 2년 동안 집 없는 설움을 얼마나 뼈저리게 느꼈던가!

남편 나이보다 오래된 구축 아파트는 배수, 누수, 곰팡이 등 문제가 없는 날이 없었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주인 할머니께 연락을 드리면 돌아오는 레퍼토리.

“새댁아, 내가 요즘 날이 추워져서 병원에 다니고 있는데 어쩌고 저쩌고(말씀이 참 많으셨지만 결론은 지금 해결 못해준다는 말). 그런데 아기는 잘 크제?”

전화하면 마치 내가 연세 많고 건강도 안 좋으신 할머니를 괴롭히는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들게 하셨다.

항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새댁이 일단 고치고 영수증 잘 모아놓으면 나중에 전세금 뺄 때 더 얹어서 주겠다는 구두계약이었다.

이전 세입자가 나가고 빈집일 때 밀려있던 관리비도 일단 우리에게 처리하고 나중에 얹어 주겠다고 하셨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때마다 사정이 급한 쪽은 나였기에 할머니의 구두계약을 녹음해놓고 영수증을 차곡차곡 모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집주인인데 전세금 올려달라는 전화가 왔을 때는 그렇게 목소리가 정정하실 수가 없었다.

할머니, 좋은 보약이라도 지어드셨나봐요. 진시황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마시겠다고 하겠네요.

남편과 논의하여 우리는 옆동네 신도시 22평 소형아파트를 영끌로 매매했다.

진상 집주인과 기나긴 언쟁과 내용증명서 발송 끝에 그 집과 겨우 이별했다.

우리가 선불로 처리해온 수리비용과 관리비는 결국 받지 못했지만 인생수업료 지불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네모반듯한 택지와 넓고 깨끗한 평지 길, 걸어서 갈 수 있는 공원과 마트, 따뜻한 햇살이 하루종일 가득한 깨끗한 새 아파트. 우리가 맞이한 신도시 라이프는 삶의 질을 상당 부분 향상시켜줬다.

모든 행복을 돈으로 살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거 아닐까?

하루하루 행복했다.

그러나 우리가 하우스푸어라는 현실을 자각하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빚에 허덕이게 되었다.

물속에서 코만 내놓고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과도한 빚은 불행을 불러온다.

외벌이로 그럭저럭 겨우 버텼지만 그런 생활은 삶의 질을 금세 떨어뜨렸다.

신도시 라이프로 인한 삶의 질 향상은 개뿔.

매일 남편과 싸웠고, 하루는 남편이 그렇게 힘들면 나가서 돈 벌어오라는 말까지 했다.

그날 밤 홧김에 이력서를 몇 군데 제출했고, 그중 한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이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부부싸움에서 홧김에 나온 말이었고, 홧김에 던져 본 이력서였는데 진짜 면접에 오라고 하다니.

그렇지만 이내 남편과 웃어버렸다. 에이, 설마 합격하겠어?      



정말 합격해버렸다.

금요일 오후에 연락이 와서는 월요일부터 출근하란다.

큰일 났다. 우리 딸은 어디에 맡기지?

갑작스레 결정된 출근에 남편은 그냥 돈 벌지 말고 아이를 잘 키우는 것에 집중하라며 말렸다.

그러나 돈도 벌고 경력도 이어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한 푼이 아쉬운 때에 따박따박 들어오는 돈이라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급하게 친정엄마에게 연락을 해서 아이를 봐주십사 부탁드렸다.

다행히 새로운 직장은 집에서도 가깝고 시간도 좋았다.

봄과 가을에는 9시에서 5시까지, 여름과 겨울에는 10시에서 3시까지 근무였다.

그래서 더 이 직장을 놓치기 싫었다.

또 직장에 가고 싶은 이유 중 남편에게 밝히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원래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런 내가 책육아에 꽂혀서 아이 책도 한글책이며 영어책까지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항상 더 사고 싶은 마음을 눌렀는데 내 월급 받으면 좋다는 그림책들 전부 마음껏 사줘야지.

아이 그림책에 대한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림책과 모래놀이세트를 들었던 손에 핸드백을 들었다.

그렇게 워킹맘이 되었다.

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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