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보 엄마의 고백
급작스럽게 결정된 취업.
아이가 네 살이 된 어느 날의 이야기였다.
친정엄마에게 급하게 부탁하긴 했지만 아이에 대한 걱정을 안 할 순 없었다.
친정엄마가 와주셔서 봐주신다니 물론 감사하지.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 푹 빠져있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었다.
'책육아'와 '엄마표 영어'
아이가 네 살이 될 때까지 입에서 단내가 폴폴 나도록 책을 읽어주었다.
책을 읽다가 목소리가 쉬어서 안 나올 정도로.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부끄러운 사정이 있다.
아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나는 하루하루 노잼엄마란 것을 깨달았다.
돌 전에야 안아서 어르고 달래며 동요 흥얼거려주면 되었지.
아이의 인지가 점차 발달할수록 역할극이란 놀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아이와 소꿉놀이를 하며 역할극을 하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나 어릴 때 같이 소꿉놀이 안 해줬나?
기억을 더듬지만 엄마랑 소꿉놀이했던 기억은 없다.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독서를 즐겼다.
그나마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좋아하는 동화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과
대화하는 것이 역할놀이 비스무리한거겠지.
아니지, 내가 어릴 때는 집 밖에 나가면 골목에 동네 꼬마들이 다 모였다.
아마도 그 코흘리개들과 같이 소꿉놀이도 하고 해적 놀이도 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때도 동네 꼬마들 다 모아놓고 동화책 변사(辯士) 노릇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둘 이상이 하는 역할놀이에 관해서는 바보인 셈이었다.
소꿉놀이 같은 역할극은 남편에게 외주를 주었다.
남편은 다행히도 역할극을 무척이나 실감 나게 잘했다.
나 같은 역할극 바보는 책 읽어주기가 가장 쉬운 놀이법이었다.
아무리 좋다는 촉감놀이, 목욕놀이 다 해보아도 결국에 내가 제일 잘하는 건 두 가지다.
모래놀이 장난감을 들고 놀이터에 나가거나 책 읽어주거나.
특히 책읽기는 글 읽어주고 그림 같이 보고,
이렇게 몇 권만 하면 시간이 1시간은 훌쩍 지나가는 시간 보내기 효자종목이다.
놀랍게도 이렇게 읽어주니 아이는 네 살 무렵 한글을 읽고 쓰기(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리기) 시작했다.
야호! 운이 좋았다.
관찰해보니 우리 아이가 시각적으로 예민한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색과 모양에 민감한 아이라서 그림책으로 거저 한글을 뗐다.
그 무렵 우연히 도서관에서 엄마표 영어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
영어로 동요와 영상 틀어주고, 영어책만 읽어주면 된다는데
책 읽어주기 밖에 못하는 나는 완전 땡큐지!
영어책도 열심히 읽어줬다.
물론 영어 그림책에 너무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당황스러웠다.
그럴 땐 그냥 발음을 뭉개서 대충 흘려 읽어줬다.
전자펜보다는 엄마의 육성을 더 좋아하는 아이라
영어가 짧은 엄마의 그 정도 꼼수는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이 그냥 넘겼다.
그렇게 하루하루 책의 바다에 풍덩 빠져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내가 했던 그대로 친정엄마에게 해달라고 부탁드리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이라고, 친정엄마도 나 못지않은 활자중독자셔서
한글책은 친정엄마에게 읽어달라고 그나마 부탁하기 쉬웠다.
내가 읽어주는 만큼은 힘들어도 하루에 한 권은 꼭 읽어주십사 부탁했다.
스마트 TV로 유튜브 들어가는 법을 가르쳐드리며
영상은 유튜브에 영어영상만 틀어달라고 부탁드렸다.
여기까진 OK
친정엄마도 쉽게 하실 수 있다.
문제는 영어책이다.
도무지 전자펜은 사용하려 하지 않는 아이라 누군가 읽어줘야만 한다.
그렇다고 영어 공부 안 한 지 30년은 훌쩍 지난 친정엄마에게
손녀를 위해서 영어공부 좀 하시고 읽어달라고 부탁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다.
나이 들고 지병이 있는 몸으로 손녀 돌보는 것도 힘든데
영어공부까지 하라니, 누가 노인학대로 신고해도 할 말 없다.
결국 영어책은 내가 퇴근하고 아이를 재울 때,
잠자리 독서(bedtime story)를 하기로 했다.
이전만큼 많이는 아니지만 한 권의 책이라도 아이를 껴안고 읽어주었다.
그 시간은 엄마와 하루 종일 떨어져 있었던 아이에게
엄마와 진하게 교감할 수 있는 서로에게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영어책 인풋(input)이 적어져서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고민도 잠깐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기로 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니깐
느리지만 한 발씩 나가다 보면 우리도 목적지에 도착하겠지.
많은 인풋보다 아이와 교감하는 이 시간이 나에겐 무척 소중하다.
학교에 입학한 지금도 종종 이런 시간을 가진다.
다른 것들은 다른 양육자나 학원에 외주를 줄 수 있지만
이 시간은 외주를 주기에 아깝다.
매일 자라는 우리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어도
머리맡에서 조용히 책을 읽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