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힘든 것도 재미있어
혼자 공부할 때 깨달은 법칙이 있다. 공부는 엉덩이가 무겁게, 무식하게 제대로 해야 남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결심했을 때, 일주일에 세 번 하루 두어 시간가량을 규칙적으로 도서관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을 겪게 되었다.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3권짜리 미술사 책을 힘겹게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후의 일이었다. 낯선 사조와 용어의 책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긴 읽었는데, 내 머릿속에 남은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이야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책을 쓱 읽고 나면 내용을 거의 외울 정도로 암기력이 좋았기에 ‘공부 = 책 읽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는 세월을 어찌 막으랴. 한동안 소설책만 보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라도 읽은 내용을 머리에 남기기 위해 서양미술사 책을 세 종류나 골라 읽었다. 그러고 나니 미술사가 어느 정도 머리에 들어오고 화가들 이름과 그림들이 얼추 남는 게 있었다.
오랫동안 혼자 그런 식으로 책을 읽으며 공부하다가 인터넷으로 인문학 공부를 하는 사이트를 알게 되어 찾아 듣게 되었다. 이때도 처음에는 철학이나 사회학 관련 용어들이 너무 어렵고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혼자 공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그것은 무조건 반복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하고, 참고 자료로 제시된 것을 찾아 읽는 것이다. 30%를 알아듣다가 50%를 이해하게 되고 70%까지 이해하게 되면 그게 어디랴 싶었다. 나는 반찬값 아껴 모은 비상금을 털어 무식하게 인문학 강의 1년 무제한 이용권을 끊었다. 하지만, 열심히 강의를 들어도 역시 답답하기는 했다. 누군가에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다가 선배를 통해 독립 연구자들이 모여 공부하는 대안 연구 공간이라는 곳에서 하는 세미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선배의 권유로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몇 번 선배를 따라가서 분위기를 보았는데 처음에는 아무래도 내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석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도 많았고, 이미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도 꽤 되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말귀도 못 알아들으면서 세미나에 참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때도 30%만 이해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1개만 했던 세미나가 3개까지 늘어난 적도 있었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내용을 발제하느라 얼굴이 시뻘게져서 더듬거린 날도 있지만, 그런 날들이 나의 공부하는 힘을 키우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런 경험과 나름의 성장 후에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대학원 공부라는 것도 내게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벽, 높아서 넘기 힘들어 보이는 벽처럼 느껴졌다. 대학원에 들어가자 읽어야 할 거리가 또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는 단행본 위주로 읽으며 공부했던 것과 다르게 수업에서 다루는 내용은 논문이 많았고 전공 관련 전문 서적도 논문 못지않게 딱딱한 용어로 가득했다. 한 문단을 읽고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하다가 다시 읽어야 하는 일이 무수히 많았다.
게다가 당시 대학원 지원자가 적어서 입학한 동기가 겨우 4명뿐이었다. 동기가 4명이라는 것은 3과목 수업에서 과목마다 거의 매주 발제를 맡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동기들은 3과목을 모두 발제하는 데 지쳐서 자신이 발표하는 부분을 겨우 읽어내는 데 급급했지만, 나는 내 발표 분량을 포함하여 수업에 제시된 자료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읽어갔다. 기존에 공부하면서 세운 원칙이 최대한 무식하게 공부한다는 것이었기에 이를 지키려 애썼다. 나는 결국 대학원에 적응하는 시기였던 첫 학기 내내 편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역시 성실하고 무식한 공부 방식의 결과 첫 학기 올 A+의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1학기 성적표를 받음과 동시에 두통은 사라졌고, 나는 완벽하게 대학원에 적응했다.
대학원 공부에도 잘 적응했지만, 나는 금방 대학 시스템 안으로도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대학원에 다니는 대학원생 중 전업 학생이라면 일반적으로 학교의 여러 가지 프로젝트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학교에서 하는 프로젝트는 공부하는 학생에게 어느 정도 수입도 되지만, 자신의 전공이나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동기들도 수가 적고 다들 일하는 사람들이었던 관계로 유일한 전업 학생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조교 역할과 프로젝트 사업 연구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전업주부에서 학생으로 다시 연구원으로 계속 변신하게 되었다.
물론 전업주부였을 때도 생협 임원으로서 오랫동안 지역에서 활동해왔기에 솥뚜껑 운전 밖에 할 줄 모르던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역 대표로서 돌봄 사업이나 교육, 축제 등 여러 가지 일에 나서기도 했고, 수백 명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일도 허다했다. 하지만 상근자들이 주로 궂은 일을 하고, 나는 조율하고 회의하고 얼굴 마담하는 대표 역할만 해봤지, 직접 실무적인 일들을 맡아서 수행하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학교 생활은 낯설고 새로운 경험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고, 주민들과 생협 조합원을 만나서 하던 일과 경험이 밑거름으로 작용하여 오히려 새로운 일에 쉽게 적응하게도 했다.
생각해보면 늘 힘들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공부하는 인간으로서 변신할 때도, 공부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시킬 때도, 봉사하고 지원하는 삶에서 직접 돈을 버는 생활인으로서 위치를 바꿀 때도 쉬운 건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일에 얼떨떨한 상태로 들어가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사람으로 바뀌는 동안 그래도 나는 그 순간들을 즐겼던 것 같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일은 늘 그렇다.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어야 현재를 뚫고 나아갈 수가 있다. 뒤늦은 공부라서 머리는 쌩쌩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충분히 아는 나이에 시작한 것만은 장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