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과정을 마치기 직전 박사 과정이 열렸다. 석사 과정에 원서를 낼 때는 이런저런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는데, 박사 과정이 열렸을 때 나에게는 일말의 고민과 망설임도 없었다. 일 때문에 바빠서 접수가 좀 늦기는 했지만, 원서접수는 겁 없이 해치웠다. 우수한 경쟁자가 많아서 떨어지게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고, 합격하면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석사 과정 원서접수 때와는 다르게 학교는 낯선 공간이 아니었고, 이제 내게는 정보가 많았다. 교수님들도 다 알고 있고, 학교 돌아가는 사정도 빠삭했다. 사실 조교와 프로젝트 일을 하면서 나는 어느새 우리 대학원 최고의 인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내가 망설임이 없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당해년도 석사 졸업 동기 중 내가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졸업예정자라는 사실이었고, 코로나19가 터져 취소되기는 했지만, 나는 졸업식에서 상을 받을 예정이었다. 석사 과정 2년간 공부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적어도 난 공부가 적성에 맞는 학생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지는 않아도 학생들 중에서 가장 다양하게 많은 공부를 해왔다는 사실을 교수님들께 인정받았던 것이다. 공부를 홀로 이렇게 많이 한 사람이 없다면서 내게 대학원에 가라고 했던 학부 시절 교수님의 말씀이 알고 보니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이 없어진 나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주위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상하지 못한 반대에 부딪혀 나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 사람들이 날 말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날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염려하는 마음에서 말리는 사람도 있었고, 날 만만하게 여기거나 부정적인 이유로 말리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늘 나를 응원하던 지인 중에서는 박사 과정의 고단함을 내가 모르고 도전하는 것이라고 여겨 걱정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석사 때는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 노력하면 학위를 받을 수 있지만, 박사 학위라는 것은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었다. 주변에 오랫동안 하다가 안 되어 포기한 사람들, 스트레스가 심해서 학위는 받지도 못하고 암에 걸린 지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몸이 약한 나를 몹시 걱정해주었다.
사실 하다가 안 되어 포기한 사람들은 주변에서 나도 많이 보았다. 국내에서 하는 거라면 그래도 다행인데, 학위를 받지 못하고 외국에서 돌아오는 경우는 무리한 유학 비용과 기대에 대한 실망의 시선 같은 이유로 좌절하고 우울증에 빠진 사례도 있었다. 끝내 논문을 쓰지 못하고 박사 수료로 마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딸의 주문을 생각했다. 어차피 안 될 걸 알고 도전하는 거라면, 안 되어도 리스크가 없다는 말을 떠올렸다. 나는 그들에게 공부가 좋아서 해보는 거라고 꼭 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서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한편으로는 ‘열심히 하다 보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도 있었다.
사람은 격려와 지지를 통해서도 기운을 얻지만, 멸시와 모욕이 없었던 힘을 끌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박사 과정에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어떤 사람은 내게 주제 파악이나 하라는 투로 네가 왜 박사 과정에 들어가려 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박사 과정이 네가 해보겠다고 할 만큼 그렇게 만만한 공부가 아니라고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왜 다른 사람의 애정 가득 담긴 진지한 조언과 깔보는 마음 가득한 조언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여기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사람은 늘 나를 집에서 솥뚜껑 운전이나 할 무식한 전업주부 아줌마로 여겼다. 초보 운전자 시절, “아줌마, 집에 가서 설거지나 해”라는 소리를 지껄이던 사람처럼 그렇게 함부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놓아도, 그 결과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은 경우에도 늘 시시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순간에 자존심이 상한 만큼 이상하게 힘이 났다. 박사 학위가 꼭 필요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공부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가 그런 반응이 나오면 오히려 내가 해내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네가 감히’가 ‘내가 반드시’로 바뀌는 데에는 그 사람의 지대한 공이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반대 의견도 이렇게 다르고, 좋지 못한 의도가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나타내어 의지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니 세상사는 참 요지경이다.
솔직히 나를 가장 좌절하게 만든 것은 내 나이였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오십이 넘은 나이다. 학위가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악착같이 학위를 마친다고 해도 젊은 박사들이 수두룩한 세상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기업에 들어가 여태까지 잘 버텨왔던 친구들도 하나, 둘 직장을 그만두기 시작한 마당에, 어떤 조직에 들어가기에는 나이도 무겁고 학위도 무거울 것이라며 염려하던 지인의 말이 다 옳게 느껴졌다. 박사 실업자가 왜 그렇게 많은지 아냐는 질문에 고개를 절로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생협 임원의 경력과 사회적경제 현장 출신 연구자로서의 자부심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차라리 석사에서 멈추고 취직하라면서 애정어린 조언을 하던 지인도 있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직장보다 학교가 체질에 맞는다면서 뿌리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수입은 비록 적어도 학교에서 하는 여러 종류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계산이 원래 약한 사람이었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라면 애초에 전혀 수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협의 임원이나 봉사 활동을 열심히 했을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은 사회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회적경제가 아니라 일반 기업에서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나이쯤 되니 확실히 보이는 것이 있다. 사람은 어차피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이상주의나 허무맹랑한 몽상으로 비치더라도 말이다. 한번 사는 삶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