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박사를 키우는 한 부대의 사람들
어떤 사건도 한 가지 측면만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와 요소, 연기와 인과의 다양한 작용들이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통해 사건을 만들고, 또 사건은 해석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이다. 나는 무수한 어려움을 뚫고 여기에 와 있지만, 나에게 좋고 나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뒤돌아보면 어떤 것은 기름진 토양이 되었고, 어떤 것은 나를 단련시킨 맵고 찬 바람이 되었으며, 또 다른 어떤 것은 빛으로 온기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내 주위에는 넘쳐나서 나까지 채우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부정적인 말에는 이를 악물고 잡초처럼 버텨 맷집을 길렀고, 긍정적인 격려에는 성장으로 답했다.
얼마 전 한 교수님이 내게 6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알고 있냐고 물으셨다. 내 엄청난 성장이 당신에게는 한눈에 보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말씀을 들으니 잊고 지낸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6년 동안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주신 그 분의 노력이 더 느껴졌다. 좌절이라도 할라치면 어느새 다가와 아주 잘하고 있다고 밥과 커피로 바닥이 난 내 자존심과 용기를 다시 수혈해주시곤 했다. 그분이 없었다면 내 발걸음이 얼마나 더 힘들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지도교수님은 진정한 은인이셨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나이 든 학생을 맡아 답답해하시기는커녕 오히려 하나씩 친절하게 지도해주셨다. 솔직히 나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분 같은 스승은 절대 못될 것 같다. 교수님은 프로젝트를 같이 할 때마다 본인이 더 실무자처럼 일하시면서 부족한 나를 뒷바라지해주셨다. 어설프고 모자란 게 드러나 부끄러워할 때면, 나도 모르는 숨어있는 내 장점을 하나씩 찾아 콕 집어내어 이것도 잘하지 않냐고 하시고는 했다.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스승이시다. 나는 그런 말씀에 홀려서 내가 정말 장점이 많은 사람인양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실은 내가 다니던 대학원의 모든 교수님이 다 그런 분들이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원의 구성원들은 시민사회 운동가, 사회적경제 활동가, 지역의 현장에서 이 사회와 시민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학생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교수님들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셨다. 스승이 아니라 선배가 되고, 동료가 되겠다는 그분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내가 거센 바람 앞에 홀로 선 것 같은 기분일 때면, 그분들이 내 주위에서 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친언니, 친오빠처럼 나를 감싸고 도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불러내어 밥을 사 먹이고, 집에 음식을 가져다주고, 아플 때 약을 보내면서 늦공부를 응원했던 분들이다. 실은 가족이 있어야 할 자리에 늘 대신 있어준 그들 때문에 땅속으로 꺼지고 싶었던 순간, 다 포기하고 어디에선가 뛰어내려 고된 삶을 마감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버텨낼 수 있었다. 삶의 고비고비마다 좌절에 빠져 벗어나지 못할 때, 내 마음까지 숨기고 억지로 가면을 쓰고 있어도 두 분은 어떻게 알았는지 금방 알아보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참 신기했다.
딸이 미국에서 돌아올 때마다 불러내어 용돈을 쥐어주고, 아들의 졸업식에 동행하여 사진을 찍어주고, 모임에 초대해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왔다. 진지하게 공부하는 세미나 팀으로 이끌어주고 책을 보내어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안내했다. 살아보니 꼭 피를 나누어야만 가족인 건 아닌 듯하다. 앞으로 나도 그 마음 씀씀이를 배워서 되갚아야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인복이 좀 있는 편인 것 같다. 많은 선배와 스승들에게 사랑받았고, 동료와 친구들의 응원을 받았다. 너무 착해서 큰일이라고 대신 싸워준 사람도 있고, 순진해서 속아 넘어갈까 걱정해준 사람은 더 많다. 공부든 일이든 이런저런 일로 도와주려고 나선 사람은 또 얼마나 더 많은가. 내 편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점점 겁이 없어지는 것 같다.
내가 가장 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고, 좋은 딸이 되고 싶고, 좋은 활동가와 연구자가 되고 싶어서 우왕좌왕할 때마다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이들 때문에 나는 수천억 원을 가진 부자보다 더 든든했다. 가끔 밤을 새우고 공부나 일할 때면 슬쩍 간식을 사다 주고, 때로는 몸 축난다고 그만 자라고 염려해주는 아이들로 인해 피로가 가실 때도 많았다.
하지만, 얼른 성공해서 책임질 테니 건강관리나 잘하라고 했던 아이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것도 있다. 박사학위와 함께 당뇨병, 고혈압, 지방간을 세트로 받았기 때문이다. 어쩐지 학위가 조금 무겁긴 하더라니!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는데도 크고 튼튼하게 자라준 아이들 덕분에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동안의 고된 삶이 보람있게 느껴진다.
백세 시대라는데, 남은 날들이 기대된다. 인생의 다음 스테이지가 내게 또 어떤 도전을 요구할지 그리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아마 난 그 자리에서 멈추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고난은 늘 나를 성장시켰다. 어제보다 오늘이 나은 것처럼 내일의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앞으로도 언제나 그렇듯 나는 도전하고 극복하면서 씩씩하고 용감하게 달릴 것 같다.
아마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갈 나의 딸도 그럴 것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으로서, 아시안으로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때로는 실망하고 좌절하더라도 딸이 오뚜기처럼 일어나 다시 도전하고 결국에는 극복하리라는 것을 믿는다. 우리 모녀의 도전 스토리는 시간이 갈수록 흥미진진해질 것 같다. 극복모녀의 솔직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한 10년쯤 후 극복모녀의 다음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들려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