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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Jun 10. 2023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에 대하여'

정신적 깃발을 잃어버린 청년 세대에 대하여

1995년 옴진리교라는 컬트 조직이 도쿄 지하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신경가스의 일종인 사린가스를 살포했다. 출근 시간에 일어난 테러는 만원 지하철에 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중태에 빠트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사건이 일어나던 때에 보스턴 교외 대학에서 일본 문학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고국에서 들려온 이 소식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1995년에 연이어 벌어진 한신 대지진과 사린가스 테러 소식을 접한 하루키는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하루키는 작가로서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이후에 출간된 하루키의 작품에는 컬트 집단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만큼 작가로서, 또 한 명의 일본인으로서 사린가스 테러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는데 그 이야기를 그의 잡문집에 한 조각으로 담아냈다. 이 사건을 다룬 언더그라운드라는 책도 썼던 만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그의 생각이 길지 않은 글이지만 잘 나타나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선 두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망자는 한신대지진이 훨씬 더 많지만 하루키는 사린가스 테러에 더 집중하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사망자 수는 한신대지진보다 훨씬 적지만, 이 사건은 일본인의 정신을 근본부터 크게 뒤흔들었다. 일본인은 지진이나 태풍처럼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대재앙과 함께 살아온 민족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이 빚어내는 폭력성은 무의식적으로 정신 안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사람들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늘 대재해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으며, 그 피해가 아무리 막대하고 부조리해도 이를 악물고 이겨내는 법을 배워왔다. '제행무상'이라는 말은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어휘 중 하나다. (중략) 그런데 지하철 사린 사건은 일본인이 ㅡ적어도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한에서는 ㅡ 지금껏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재해였다. 그것은 종교단체가 교의의 연장선상에서 일으킨 특수한 독가스 병기를 쓴 계획적 범죄였으며, 사실상 일본인이 일본인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본이 '세상에서 유례없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라는 공유관념의 붕괴였다.


'같은 일본인이 일본인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죽이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성격이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같은 일본일을 그토록 증오하도록 만들었을까,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잇따랐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나자 사람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컬트 종교에 빠져 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이라고 하면 어딘가 무시받고, 핍박받고, 또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유망한 미래를 가졌을 법한 사람들이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광신도'가 아니라 아주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심장외과 전문의, 와세다대학 응용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대학원생, 또 응용물리학과 전공생과 같은 과 박사 과정에 진학한 사람, 그리고 인공지능 연구원까지,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봐도 아주 유망한 인재들이었다. 장차 미래 산업의 중추를 맡을 법한 인재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믿을 수 없는 테러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이거나 다치게 만든 사람들은 소위 '잘 나간다'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만원 지하철에 타서 고단한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이공계 엘리트였다는 것 말고도 하루키는 그들이 속한 '세대'에 집중한다. 그들은 대부분 삼십대였다. 하루키가 본 그들 세대는 '뒤늦은' 세대다.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시대 이후에 등장한 세대, 커다란 정치문화적 충돌과 혼란이 정리되고 난 후에 등장한 세대다. 하루키는 이들 세대가 놓인 환경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잔치가 끝난 후'의 께느른한 고요함이었다. 일찍이 높이 세웠던 이상은 빛을 잃었고, 날카롭게 외쳐댔던 말은 힘을 잃었으며, 도전적이던 카운터컬쳐도 첨예함을 잃었다. (중략) '좋은 것은 이전 세대에게 엉망으로 침해당했다'는 막연한 실망감에 휩싸였다.


그들 세대는 냉정하고, 개인주의적이고, 방어적이며, 수평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앞선 세대의 중심 명제가 '공유감'이었다고 하면 새로운 세대의 중심 명제는 '차별성'이었다. 문제는 차별성을 추구하지만 거기에는 깨지지 않았던 암묵적 사회 규칙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 차이가 세간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커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다. 잔치가 끝난 후의 께느른한 고요함의 세상에 등장한 그들은 더 이상 역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회에서 각자 자신의 개성,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 헤매었지만 아직 변하지 않은 사회의 암묵적인 룰 안에서 방황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지만 사회가 허락하는 마땅한 방법은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출구 없는 차이'를 향해 갔다고 하루키는 이야기한다. 거기에 거품경제의 출현은 그들이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을 명품, 외제차, 빈티지 와인 같은 것으로 돌렸다.


세상사는 카탈로그처럼 진전되어 갔다. (중략) 그러한 경쟁이 야기하는 것은 대부분의 국면에서 드러나는 한없는 폐색감이며, 목적 상실에서 비롯한 욕구불만이다.


그렇게 나른한 시대에, 목적을 상실한 정체성을 향해 방황하던 세대는 마음 편한 선택지를 마주했다.


강력한 아우라를 가진 누군가가 시스템 밖에서 나타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신선한 공기를 안으로 불러들여, '개별적 차이니 뭐니 그런 성가신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리로 와 시키는 대로만 해라'고 말을 건넸을 때 그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사건은 단지 몇 명의 청년이 일으킨 문제가 아니라 곪아 있던 사회의 문제가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향할 곳을 잃어버린 청년들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사회에는 언제나 조금은 독특하고, 주류 사회에 속하지 않고, 괴짜나 오타쿠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해 왔다. 이 사건을 일으킨 이공계 청년들도 사실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공계를 전공했고, 관계가 좁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그런 괴짜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갈고닦아서 전문가가 되고, 기업에 들어가 연구원이 되고, 학자가 되어 전문적인 성과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방향성을 잃고 사회에 수용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하루키가 지적하는 이유는 결국 '목적 상실'이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변화시켰을까? 답은 확실하다. 사회 자체가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가시적인 목적의 상실이다. '사회화'가 더는 자명한 선이 아니게 된 시점에서 그들은 '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중략) 그들이 제기한 의문은 대부분은 정당했다. '전후 오십 년간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끊임없이 물질적인 풍부함을 추구한 결과 우리는 지금 어디에 도달했는가? 우리 사회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진다. 하지만 핵심은 이미 등장했다. 정치적, 문화적 혼란기가 정리되고 난 뒤에 등장한 청년 세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시기에 도달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고 물질적인 풍요 또한 이미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시기에 나타난 세대,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이어야 하는 시기에 가야 할 방향성을 잃은 그들은 생각보다 취약할 수 있다.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혼란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풍요로운 시기에 살게 되었는데 무엇이 문제냐, 혹은 배가 불렀다 하고 말할 수도 있지만 청년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부른 배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고기가 아니라 사상적 지향점이다. 바라보고 갈 수 있는 선, 정신의 깃발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에너지는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흐를 수 있다. 그렇게 벌어지는 일은 단지 몇 명의 일탈로 치부하기 어려운 사회의 과제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 실린 길지 않은 이 글은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우리 사회도 민주화, 산업화를 향한 혼란을 치열하게 겪어냈다. 그리고 지금은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질 필요도, 산업화를 위해 몸을 갈아 넣을 필요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안정화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풍요롭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젊은 세대에게 좋은 시기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기성세대에게는 '민주화'가 선이었고 '산업화'가 선이었다. 그 선을 향해서 달리면 됐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선'이랄 게 없다. 사회는 더 이상 답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 청년들은 욜로족이 되기도 하고, 파이어족이 되기도 하고, 과시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물론 기성세대로서는 낭비하고, 진득하지 못하고, 남들 시선만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 세대는 탐탁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일탈할 수는 있어도 한 세대가 일탈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사회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린가스 사건처럼 충격적인 일은 아니더라도 요즘 하루가 다르게 믿기 힘든 사건들이 뉴스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들 중 꽤 많은 비중을 청년들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더 크고, 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미래 세대에게 그들이 향할 곳을 제시해주고 있을까?


사람에게, 특히 청년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풍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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