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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Dec 17. 2023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보여주면서도 그 부조리함에 잠식되지 않는 문장으로 쓰여 있다.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글을 쓰려다 보면 그 어두움에 글이 잠식되어 과하게 치우치거나,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오히려 호소력을 잃거나,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기 쉽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의 글은 담담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것처럼 묵묵히 사회가 가진 문제를 서술한다. '19호실로 가다'도 그런 작품이다. 기성 사회에서 여성의 삶이 겉으로 순탄해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는 크고 무거운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담담한 서술과 이야기의 구조를 통해서 보여준다.


글의 주인공이자 깊은 문제를 안고 있는 수전은 똑똑한 여성이었고 광고회사에서 자신의 일을 잘하고 있었다. 매슈는 대형 신문사 차장급 기자였다. 둘 모두 아무런 문제 없이,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둘은 만나게 됐고, 서로가 마치 운명의 상대인 것처럼 빠르게 결혼을 향해 나아갔다. 누구 하나 부족함 없이 매력적이고 이성적이었던 그들은 순탄하게 결혼했고, 그들의 사랑을 소중히 아끼고, 아들, 딸, 쌍둥이까지 총 넷을 낳아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는 엄마가 필요하다는 동의 하에 수전이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 이성적인 부부는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에 어떠한 잡음도, 문제도 겪지 않았다. 현명하게 생각해서 최선의 선택을 했고, 서로의 의견을 이해했다. 그렇게 12년이 지나고 쌍둥이가 학교에 들어간 뒤에 수전은 다시 자기만의 시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수전은 자기만의 시간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을 때 아이들을 걱정했고, 가정부가 있어서 굳이 할 필요 없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바느질 같은 소일거리를 했다. 시계를 계속 보며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을 확인하기도 했다. 수전은 여전히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갖지 못했다.


처음에 나는 어른이 된 뒤 12년 동안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인생을 살았어. 그리고 결혼했지. 처음 임신한 순간부터 나는, 말하자면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어. 아이들에게. 그 후 12년 동안 나는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 나만의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까 이제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해. 그뿐이야


혼자 있어도 혼자 있지 못하게 되는 날들이 이어지며 수전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러한 자신의 불안을 남편인 매슈에게 제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매슈와 수전은 만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없는, 모두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는 생활을 해왔다. 수전은 그 관성을 깨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힘을 내서 이야기를 해봐도 매슈는 수전을 충분히 이해해주지 못했다. 둘 사이에 예전 같은 사랑은 없었고 가족으로서의 정만 남아 있는 듯했다.


그래서 수전은 모두에게 비밀로 한 채 장을 본다며 외출해서 근교의 허름한 호텔에서 낮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허름한 호텔의 19호실, 수전은 거기서 비로소 혼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된다는 게 수전의 내면을 다시 채워주지는 못했다. 단지, 완전히 혼자가 된다라는 조건만 만족시켰을 뿐, 상황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위태로운 나날이 반복되던 중, 매슈가 19호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수전은 더 이상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19호실에서 생을 마감한다.


수전과 매슈가 겪은 일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어떤 눈에 띄는 사고도, 둘 중 한 명이 가진 치명적인 문제점도 없다. 둘 모두 현명한 사람들이었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었다. 결혼생활마저도 순탄했다. 조금 거슬리는 게 있었다면 너무나 순탄해서 지루했다는 점뿐.


하지만 그 순탄함이, 순탄해야 한다는 관성이 이들을 서서히 무너트렸다. 수전은 성인이 된 뒤 12년 동안 사회의 일원으로, 한 사람으로서 살아왔다.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난 뒤 12년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한 순간에 다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야 했다. 누군가는 고생했다고, 좋은 일이라고, 이제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12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12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그 긴 시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혹은 없어야 할 것만 같은 관성이 주는 무게는 전혀 작지 않다. 수전은 그 무게를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과제를 함께 풀어나가지 못했다. 순탄했던 그들의 삶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19호실로 가다'의 첫 부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지성, 이성, 합리성과 같은 고등 동물로서의 인간의 장점은 가끔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삶도, 사회도 완전할 수 없다. 어딘가 부족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하고, 감정적이며 치우쳐있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척하는 것들로, 그런 잣대로 해결하려다 보니 피하게 되고 덮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건 수전과 매슈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학습된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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