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sra, Turkey
인천에서 도하를 경유하여 이스탄불까지 17시간. 공항 게이트를 나서자 하늘을 가득 채우며 맞이하는 눈송이들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예약해놓은 렌터카를 수령하러 갔다. 공항 주차장의 렌터카 사무실에는 금발의 아주머니가 두꺼운 옷을 껴입고 앉아있다. 영어를 잘 못하는 그녀가 단어들을 뱉을 때 마다 하얀 입김이 후후 나온다. 어찌저찌 빨간색 무보험 소형차의 차 키를 받았다. 여행에 함께하는 두 개의 커다란 캐리어와 피곤한 몸뚱아리를 거기 싣고, 그새 더 거세진 눈보라를 뚫으며 7시간 우여곡절 끝에 첫번째 목적지, 아마스라에 겨우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면서 피부에 닿는 더 차가운 공기에 자연스레 어깨는 움츠러든다. 나는 옷소매를 여몄다. 거의 도착했다는 나의 메시지를 받고 추운 날씨에도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가슴 깊숙한 곳에서 감사함이 퍼져나왔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오느라 수고했다고 말했다. 항공사 기준을 꽉 채워서 챙겨온 무거운 캐리어를 엘레베이터가 없는 4층 숙소까지 낑낑거리며 올렸더니 이제야 나도 몸에서 열기가 생겨난다.
몇시간 전부터 열심히 작동하고 있었을 라디에이터 덕분에 다행히 숙소에도 훈기가 있었다. 호스트가 설명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면서 등에 맨 베낭의 무게가 느껴진다. 짐을 모두 내려놓고 이제 드디어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한번 더 실감한다. 얼굴에 자연스런 미소가 만연한다.
'이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밖은 우리의 여행이 쉽지는 않을 거라 말하는 듯,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져 있어야할 아름다운 풍경은 모두 어둠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를 기어코 여기로 오게한 지난 날의 용기에 감사하고, 그 무모함에 순간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다음날 아침, 어느새 어둠은 햇빛에 갈라졌고, 마침내 밝은 바깥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밤새 창틈을 비집고 들려오던 파도소리의 출처도 이제야 명확해진다. 간간히 들려오는 갈매기의 울음은 풍경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나의 입꼬리에서는 한번 더 즐거움이 새어나왔다. 잠시 밖을 바라보며 잠을 깨자 이윽고 들려오는 배꼽시계의 알람. 그 소리는 우리를 눈 덮힌 바깥 세상으로 밀어낸다.
'부산에는 이 정도 눈, 못본다이가?'
한뼘 넘게 쌓인 눈 위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며 우리는 조용한 터키 마을에서 꽤나 눈에 띄는 동양인 부부로 신고식을 치르고 있었다.
경치가 좋은 숙소를 선택했던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이라는 호스트의 말 대로, 우리는 바깥에선 덜덜 떨면서도 숙소 안에서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여행은 공간이 아닌 시선의 변화'라던 어느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게 여행은 공간과 시선이 함께 변화할 때 가장 깊이있게 다가온다.
눈이 녹을 때까지 며칠동안 숙소에서 몇 걸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식탁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일하며, 휴식하며 바이오 리듬을 터키에 동기화 했다. 작은 모니터에 눈동자를 고정하고 일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서울에도, 부산에도 가 있다. 피로가 찾아와 영혼이 육체로 다시 돌아오면 귀에 밀려드는 파도가 그제야 느껴진다. 이 몰입 전환 경험이 잦아지면 살아있음을 느낀다.
몇번의 햇살이 거리에 쌓인 눈을 적당히 녹이니 이제 드디어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난다. 며칠 전에 거리에 쌓인 눈을 뚫고 근처의 마트를 찾아 떠날 때에는 한 블록 한 블록이 너무 멀게 느껴졌는데, 이제 걸음이 편해지니 이 동네가 얼마나 조그마한지 와닿는다. 동네를 살피자며 정처없이 무작정 걸어 보았다. 아직 길모퉁이에 남아있는 눈더미를 피해서 몇 군데의 마트와 식당을 눈도장 찍다보니 벌써 한바퀴를 돌았다. 허탈한 마음에 구글맵을 꺼내들고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이 있다는 언덕으로 방향을 틀었다. 숙소에서 나온지 30분도 안된 시점이었다.
아름다운 뷰 포인트로 올라가면서 길거리의 개와 고양이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개는 사람만한 덩치로 꽤 위협적이었는데, 알고보니 터키는 시에서 유기견들을 관리한다고 했다. 녀석들의 귀에는 식별 태그가 달려 있었는데, 시에서는 예방접종과 중성화 수술을 해주고, 마을 전체는 공동 육아하듯 물과 사료들을 집 앞에 놓아주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녀석들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따라오거나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 언덕 정상으로 가는 동안 우리도 한 녀석과 예상치 못한 동행을 할 수 있었다. 즐거운 경험이었다. 유기견인듯 애완견인듯, 장단점이 있겠지만 특별해보였다.
숙소의 호스트는 아마스라가 터키 자국민들에게 꽤나 유명한 관광지라고 소개했다. 그렇겠다 싶었던 것이, 우리가 방문한 어떤 곳에도 영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기초적인 회화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정말 간절하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손짓 발짓으로 해결해야 했다. 번거롭게 번역 앱을 꺼내야하는 일도 잦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낯선 동양인 부부가 지나가면 고개가 돌아가던 사람들에게서 경계보다는 호기심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거리에서 험상궃은 터키 아저씨들을 만나 왠지 무섭게 느껴질때면 우리는 왼쪽 가슴을 짚으며 "메르하바" 하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 인사를 듣고 그들이 미소를 지어주면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남들은 터키 패키지 여행에서 반나절 들릴까 말까한 작은 마을에 우리는 거진 일주일을 있었다. 풍경을 바라보고, 한국에서 가져온 똑같은 일을 하고. 하루종일 파도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있었다. 덕분에 그들이 사는 모습을 조금 더 경험할 수 있었다. 한적했고, 조촐한 마을이었지만, 그들이 보내는 시간들이 전혀 초라해보이지 않았다. 머무르는 동안 바닷가의 한 레스토랑에서는 어떤 아저씨의 생일 축하 파티도 보았고, 작은 해변에는 추운 날에도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웨딩 사진을 찍고 있는 한 커플도 보았다.
"그들이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같을까? 그리고 어떻게 다를까?"
9개월간의 긴 여행을 시작하면서, 총 8개의 도시에서 한달살기를 계획하고 있다. 아마스라는 한달살기가 아닌 짧은 여행이었던만큼 여유를 주는 작은 마을이었다. 비록 폭설으로 인해 마을 구석구석을 더 꼼꼼히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했으나, 그 덕분에 숙소 창가에서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더 자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랬다. 아마스라는 내가 꼭 땀흘려 가까이 가지 않아도 파도처럼 다가와주었던 것 같다. 긴 여행의 시작으로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