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연 개인전 《태어나는 것, 살아가는 것, 지켜내는 것》
흙으로부터 예술하기
이자연의 예술은 언제나 ‘삶의 자리’에서 출발한다. 그녀의 조각은 태초의 감각처럼 몸에서 시작해, 손에서 흙으로, 다시 생명으로 이어진다. 여성의 육체와 자아를 매개로 존재의 경계와 사회적 규범을 탐색하던 그녀의 작업은 이제 땅의 언어로 말을 건다. 그것은 물질의 표면에서 끝나지 않고, 존재의 근원과 관계의 본질을 더듬는 사유의 여정이다. 도시의 스튜디오를 벗어나 작가의 예술이 충남 예산의 흙으로 내려온 것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예술의 근원, 즉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예술’에 대한 회귀였다. 그곳에서 이자연은 “농사하기”를 통해 예술의 언어를 다시 배우고, “예술하기”를 통해 농사의 철학을 새로이 발견한다. 이 회귀의 과정은 곧 “태어나는 것, 살아가는 것, 지켜내는 것”이라는 이번 전시의 문장적 구조로 귀결된다.
몸에서 땅으로 발아하기
2000년대 초, 이자연의 작업은 여성의 신체와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녀의 초기 조각들은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규범적 몸의 형상을 해체하고, 상처 입은 자아와 감정의 덩어리를 물질로 드러내는 시도였다. 늘어진 살덩이, 반인반수의 형상, 벌레나 식충식물의 형태는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 내면과 외부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 시기의 작업은 불완전한 몸에 대한 통렬한 응시이자, 세계와의 관계 맺음을 회복하려는 몸의 저항이었다. 그로테스크하고 도발적인 형상들은 ‘몸’이 감당해야 했던 세계의 무게를 물질로 드러낸 상징이었다.
2010년대로 들어서며 그녀의 작업은 서서히 변한다. 도발적인 조각과 자화상적 이미지에서 식물의 생장과 리듬에 대한 조형적 관심으로 전환이 된다. 그 대표적인 변화가 바로 ‘고요할 적(寂)’과 ‘붉은 촉(觸)’ 시리즈다. 작가는 종이를 한 장씩 말아 올려 식물의 줄기처럼 마디를 하나씩 세우는 과정을 통해 ‘자라나는 형태’의 조각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작가의 작업은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서 벗어나, 생명 자체의 시간성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자연의 손끝에서 ‘몸의 파편’은 ‘생명의 단서’로 바뀌었고, ‘표현’은 ‘관찰’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격렬한 감정이 엉겨 붙은 조각이 아니라, 감정을 정제한 끝에 남은 ‘침묵의 형태’다. 이러한 작업의 변화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가 초기에 탐구한 불완전한 몸은 이후 농사적 예술로 확장되는 생명과 인식의 뿌리가 되었다. 몸의 상처와 흙의 시간은 ‘살아 있음의 증거’라는 점에서 같은 근원을 공유한다. 그녀는 불완전한 몸을 통해 삶의 덧없음을 마주했고, 흙을 통해 지속의 의미를 배웠다. 이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이자연의 예술은 ‘몸의 예술’에서 ‘땅의 예술’로 확장된다.
‘농사하기’와 ‘예술하기’
2019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농사적 예술하기 프로젝트〉는 농사를 단순히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또 하나의 언어로 이해한다. 씨앗을 뿌리고, 싹이 트고 자라나며, 마침내 시드는 과정을 몸으로 경험하는 일은 예술의 시간 구조와 정확히 닮았다. 그녀에게 ‘농사하기’는 ‘예술하기’로 하나의 생명체처럼 성장한다.
이 생각은 2024년 《누구의 손으로 나를 키우는가》 전시의 연결이자 지속적인 농사행위의 성찰과 자각의 태도로부터 시작되었다. 2019 ’농사적 예술하기‘ 프로젝트에서 처음 시작한 농사로 나의 행위, 뙤약볕에서 마주하는 나의 성찰과 반성의 시간이었다.
이후 《매일 같은 일, 그날이 그날 같은》(2021)을 통해 꾸준함과 반복된 일상에서 꾸준함과 성실한 농부의 태도를 보고 배웠으며, 《누구의 손으로 나를 키우는가》(2024)에서는 시간, 역사, 사람, 지역, 소멸 등 개개인이 자연과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 작가노트中
작가노트에서 언급되었듯 그녀는 자기표현의 주체에서 ‘삶의 관찰자’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작가가 처음 목화를 재배하며 목도한 것은 단지 식물의 생장 과정이 아니다. 흙의 비옥함, 햇빛과 강수량, 노동의 시간과 리듬, 손의 행위와 감각, 마음의 상태 - 이 모든 변수에 따라 매번 다른 결과가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이 변주들은 예술의 과정과 닮아있음을 성찰한다. 농사와 예술 모두 결과를 향해 가는 행위가 아니라, 기다리고 관찰하며 수용하는 과정 그 자체다. 그리하여 농사의 시간은 예술의 시간으로, 노동의 땀방울은 창작과 조형의 언어로 전이된다.
존재를 일구는 손, 흙의 시간
일제강점기 미곡창고로 지어진 공간 이음창작소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 《태어나는 것, 살아가는 것, 지켜내는 것》은 지난 5년간의 농사적 예술 실천이 응축된 장(場)이다. 전시의 세 문장은 생명의 주기, 즉 생성–유지–소멸의 순환 구조를 그대로 담아낸다. ‘태어나는 것’은 씨앗의 시간이며, ‘살아가는 것’은 노동의 시간, ‘지켜내는 것’은 기억의 시간이다. 이 세 문장은 작가가 몸으로 살아낸 시간의 층위이자, 예술의 형식을 넘어서는 생의 윤리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는 영상, 설치, 사운드, 그리고 물질의 시간으로 구성된다. 농민들의 목소리를 담은 영상 <농사에 이르다>(2025)는 “농사하기”라는 행위에 깃든 작가의 철학과 신념을 들려주며,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화면 속에서 오히려 노동의 존엄이 또렷하게 부각된다. 황토와 석고로 구현된 <땅의 이면>(2025)은 보이지 않는 땅속 생명의 경로를 시각화하며, 수많은 생명의 길과 땅과 흙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낸다. <이자연_괴근>(2025)은 철사로 엮은 뿌리형태의 조형으로 생명의 근원을 추상적으로 드러낸다. 직접 재배한 율무를 한 알씩 꿰어 만든 작업 <묵상>(2025)은 수행과 명상의 형식을 띠며, <질료에 대한 미적 탐구>(2025)는 수집된 자연물과 농사 기록, 생태 자료들은 예술의 질료가 곧 삶의 흔적임을 증언한다. 또한 어린이와 농민의 대화를 담은 <농사 경험에 대한 인터뷰>는 세대를 잇는 생명의 감각을 조용히 환기한다.
이처럼 전시의 각 장면은 ‘태어남–살아감–지켜냄’의 순환 구조 안에서 서로 맞물린다. 씨앗을 뿌리고, 흙을 가꾸고, 생명을 보살피는 모든 과정이 예술의 언어로 번역된다. 관객은 그 흐름 속에서 생명을 일구는 손의 의미, 그리고 흙이 품은 시간의 깊이를 체험하게 된다.
이음창작소는 한때 수탈의 현장이자, 농민들의 노동이 축적된 장소였다. 이제 그 공간이 예술의 이름으로 다시 열리고, 생명의 감각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이자연은 이 역사적 공간을 ‘지켜내는 생명’의 장소로 재구성함으로써, 예술이 가진 사회적 의미를 새롭게 제안한다. 과거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공간에서 그녀는 흙과 노동, 생명을 매개로 예술의 치유적 잠재력을 실천한다. 이때 예술은 단순히 미적 결과물을 생산하는 행위가 아니라, 기억을 보존하고 존재를 회복하는 실천이다.
땅을 닮은 예술, 삶을 닮은 태도
삶의 모든 물질에는 태어나는 이유가 있고, 살아가는 과정이 있으며, 지켜내려는 의지가 있다. 이자연은 이제 ‘만드는 일’보다 ‘지켜내는 일’에 가까워진 듯하다. 이는 완성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방식이자 태도이다.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고, 흙을 매만지며 사유하는 그 모든 과정이 예술로 확장된다. 이때 그녀의 예술은 세계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살아내는 방법이며, 그것은 세계와 함께 살아가는 몸의 기록이며, 땅의 숨결을 닮아간다. 그 속에서 땅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기억과 생명의 주체로 등장하며, 예술은 더 이상 인간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내는 관계의 증언이 된다.
“태어나는 것, 살아가는 것, 지켜내는 것.” 그것은 한 개인의 노동에서 출발해, 모든 생명의 순환으로 확장되는 사유의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