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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림 Mar 17. 2024

작가의 일

작가라는 칭호를 듣는 것은 아직은 부끄럽고 거북한 마음이 앞서는 일이다. "뭐 역사에 남을 대단한 작품을 남긴 것도 아닌데" 하는 심정이 되는 것은 겸손의 마음이 아니라 저절로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다. 


주말 어딘가에서 몇 분과 졸저를 두고 얘기를 하는 자리에서 마주친 소박한 질문들은 작가의 일에 대한 솔직한 문제제기였다. '수입'이나 '내적인 만족' 같은 단어들 속에 들어있는 대화들은 미술작가인 김범준의 이런 말로 대신할 수 있을 듯하다.   


작가는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적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 기질을 토대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쩌면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일 수 있다. 마치 무속인이 내림굿을 받지 않고 운명을 거부하면 삶을 살아가기 어려운 것처럼.

    -  <미술관을 좋아하게 될 당신에게> 김진혁 지음, p.108 


진정한 작가는 모름지기 그 장르를 막론하고 이런 내면의 단단한 마음이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 책 한 권 쓰고 작가연하고 목에 힘을 주는 건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대다수 전업 작가, 즉 '글로생활자'의 열악한 수입과 그 생활의 팍팍함을 알기에 작가라는 신성한 호칭이 난무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자신만의 '고독의 방'에서 보상 없는 외로움을 기약 없는 기간 동안 너끈히 견뎌낸 이들에게 따라오는 숙명과도 같은 영광스러운 호칭이 '작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난 그저 글 쓰는 '척'하는 하고 많은 '작가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꾹꾹 삼키며 조촐한 모임을 견뎠다.   


더 철저히 외로워져야 한다는 헤세의 말이 메아리쳐온다. 


우리는 외로워져야 한다. 아주 철저히  외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자아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쓰라린 고통을 맛보는 방법이지만 그래야  우리는 고독을 극복하고 더 이상은 외롭지 않게 된다.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자아가  나눌 수 없는 영혼, 즉 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 놓여 있으면서도 그  다중성에 구애받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  가장 깊숙한 영혼은 자신이  모든 존재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견디거나 즐기는 것, 그건 모든 작가 아니 예술가들의 일이 아닐까.      


(ReUp) Kyung Wha Chung plays Brahms Violin Concerto (2001)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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