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30여 년 전 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중요한 과목이었다. 지금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세상이 이렇게 글로벌해질 줄 알았다면 아니 내가 미국에 살 꿈을 가진 사춘기 소녀였다면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평생 부산도 벗어난 적 없는 지방소녀였고 그땐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내 남은 평생을 미국에서 보낼 줄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 영어는 나에게 화학과 생물등과 마찬가지로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는 학문이었다.
학창 시절 내 안의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기에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선생님에게 맞기 싫어서 숙제를 억지로 해갔지만 수업에 거의 집중하지 못했고 영어는 단어의 뜻은 좀 알아도 문장의 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수업시간마다 외치는 be동사와 일반동사의 차이도 전혀 모른 채 어찌어찌 대학을 진학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미국유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때부터 부랴부랴 영어공부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어설픈 듣기, 어설픈 단어암기, 그리고 어설픈 독해위주의 공부였다. 일단 시험을 패스해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국으로 떠났고 나의 영어공부는 그야말로 내 미국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문자로 영어를 공부했지 언어로 공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듣기와 읽기는 그럭저럭 해도 말하기도 쓰기도 되지 않았다. 마치 구슬을 수백 개 가지고 있지만 실이 없어서 하나로 끼우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영어가 언어도 내 삶에 들어온 것은 오히려 첫째를 낳고 첫째와 함께 영어공부를 하면서부터이다. 아이에게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고 아이의 학교 숙제를 같이 도와주고 하면서 문장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에게 반복적으로 동화책을 읽어주고 아이의 글쓰기 숙제를 도와주면서 조금씩 단어가 문장의 자리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였다. (여전히 나는 원어민처럼 완벽하진 않다. 문법이나 발음이 정확하지도 않고 원어민들이 쓰는 은어나 속어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활영어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이런 이유로 해외여행을 다니거나 회화위주의 영어공부를 하고 싶은 분들에게 나는 초등학교 2-5학년 수준의 동화책을 반복해서 읽고 외울 정도로 보는 것을 권한다. 그 수준이면 어딜 가든 무리 없이 회화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달랐다. 거기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대학원 논문이었다. 대학원을 입학할 때 논문을 쓰는지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논문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마치 초등학교 수준의 언어를 가진 아이가 대학원 논문을 써야 하는 기분이었다. 학교를 포기할 수 없는 책임감이 수업을 끝까지 듣게 했고 그 덕분에 논문을 마쳤다. 물론 그 과정은 정말 혹독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논문을 쓰고 나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뭐든 엄청나게 크게 보이는 것도 잘게 쪼갤 수 있다는 것이다. 수박 한 덩이는 한번에 먹기에 너무 커서 먹을 엄두가 나지 않지만 수박 한 조각은 별것 아니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은 내가 큰 도전 앞에서 주눅 들어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수박을 보지 말고 한 조각만 보라고..
일단 내가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기 위해 필요한 수없이 6-7과목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심리대학원은 그 과목을 성실하게 잘 따라가기만 하면 1년 반정도나 2년 후에 논문이 완성될 수 있도록 구조화시켜 두었다.
첫 번째 수업은 연구대상 설정이나 논문에 관한 방법 등을 배우면서 자신에게 맞는 연구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나 연구가 무엇인지 브레인스토밍하는 시간을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논문이 어렵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두 번째 수업은 자신이 관심 있는 연구분야에 관련된 모든 레퍼런스를 찾는 것이었다. 만약 '캘리포니아 이민자들의 정신질환이 미국 현지인들의 정신질환 보다 취약할 것이다'라는 가설을 내세웠다면 이민자들의 현황, 이민자들의 어려움, 정신질환의 빈도나 정도, 미국현지인들의 현황, 치료방법, 한계등에 대한 다른 논문들이나 최근 도서를 다 찾아야 한다. 자료가 적어도 100개 이상은 되어야 했다. 혹시 자신이 생각한 가설과 비슷한 논문이 있는지도 찾아보고 결과까지 살펴야 했다. 이 과정이 어쩌면 시간이 가장 많이 소모되고 힘든 과정이었다. 처음엔 논문 한편 읽을 때도 남들보다 배나 걸려 너무 걱정을 했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수루룩 읽게 되었다. 더불어 이 논문들을 살피면서 나는 영어 문장의 구조, 단락의 구조, 글의 전체 구도를 어떻게 잡는지 배웠다. 아마 교수님들도 이런 교육의 효과를 기대하셨을 것이다.
세 번째 수업은 자신의 참고자료를 가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의 주제와 대상을 정해야 한다. 여기서부터가 창의력의 싸움이다. 남들이 했던 연구도 안되고 또 데이터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연구여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왜 이 가설로 연구를 하고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수님들에게 소위 연구주제가 까일 수도 있고 거부당할 수도 있다.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국은 교수가 연구 주제를 정해주거나 하지 않고 스스로 가설, 주제, 방법 모두 정해야 한다. 다만 교수님이 '이건 현실 불가능하다. 이 주제는 데이터를 내기 어렵다. 너무 포괄적이니 좀 더 주제를 줄여봐라'라는 정도의 피드백을 준다.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법을 배운 것이라는 것은 후에 깨닫게 되었다.
네 번째 수업은 만약에 자신의 가설과 연구방법이 무리가 없다면 진짜 연구를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연구 주제와 방법에 대한 구체적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도 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으로 이민 온 지 5년 이내의 참가자 30명과 미국에서 태어난 참가자 30명이 필요하고 그들에게 설문조사로 정신질환에 대한 어려움, 극복방법 등을 물어보는 것이다. 이 모든 설문지 등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대상자도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여기서 논문이 막혀버리는 친구들이 좀 있었다. 연구자체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만약 연구를 했다면 연구결과를 도출해 내고 자신의 가설이 맞았는지 아닌지 증명해야 한다.
다섯 번째 수업은 정말로 이제 쓰기, 엉덩이와의 싸움이다. 두 번 째는 읽기와의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쓰기와의 싸움이다. 미국은 참고자료를 무작위로 도용하는 것을 범죄라고 생각하기에, 참고자료를 어떻게 잘 인용하는지에 대한 것도 따로 배운다. 각각의 연구분야에 따른 참고자료 인용표시 방법이 다르고 문서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또 따로 배웠다.(이 과정에서 참고자료 인용을 제대로 표시하지 못한 경우 표절이 되는 것이다. 인용구를 쓰지 않으면 타인의 생각이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도용되어 보이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문표절이 이런 이유이다.) 논문의 서론, 본론, 결론이 따로 놀지 않고 나의 가설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잘 어우러지도록 쓰는 것이다. 그것을 중간중간 교수님께서 확인해 주신다. 만약 앞 수업에 참고자료를 충분히 조사하고 잘 정리했다면 생각보다 쉬운 일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시 참고논문까지 찾아야 하기에 고통스러운 시간이 된다.
이 수업을 들을 때 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앴다. 교수님 또한 한 번에 다 쓰려고 하지 말고, 한 번에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어차피 수정편집이 필요하기에) 말이 되든 말든 매일매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3시간씩만 쓰라고 강조하셨다. 무식하게 교수님 말을 믿고 하루에 적어도 2-3시간 논문을 채워 넣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100페이지 정도를 채웠다.
마지막 수업은 그 무시무시한 수정과 편집이다. 연구가 끝나고 어찌어찌 100페이지를 채운다고 논문이 끝이면 좋겠지만 사실 이때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특히 나에게는. 문법은 맞으나 문장의 뉘앙스가 이상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아서 온통 수정해야 했다. 거기다 여러 교수님들에게 논문을 보여주면, '이 단락의 참고자료가 부족하다. 이 단락은 가설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의 자료인용이 잘못되었다.' 등의 피드백을 받고 다시 수정하고 다시 교수님께 보내고를 반복하고야 끝이 났다. 그렇게 나는 미국에서 논문 한 편을 완성했다.
영어단어 외우기-> 영어 말하고 읽고 쓰기 배우기-> 문장구조 익히기/쓰기-> 문단구조 익히기/쓰기-> 참고자료 찾기-> 논문 읽기-> 논문정리하기->주제정하기-> 가설 정하기-> 연구대상 정하기->연구하고 데이터 모으기-> 서론 쓰기-> 본론 쓰기-> 결론 쓰기-> 참고자료인용정리하기-> 수정편집하기
처음부터 수박한덩어리를 한번에 통째로 삼키려고 했다면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박을 작게 잘라서 먹는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이 과정을 배우고 나서 나는 막막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늘 작게 잘라보는 연습을 한다. 오늘 하루의 힘을 믿었고 시간의 힘을 믿었다. 오늘 하루하루의 실행과 시간의 투자가 길게는 6개월 1년 3년 뒤에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많은 사람들이 큰 도전 앞에 지레 도망가는 것은 그 도전을 잘라본 경험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작게 잘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부담 없이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티끌모아 태산이 되는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오늘 티끌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루의 티끌을 소중히 여기고 잘 쌓다 보면 진짜로 언제 가는 태산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