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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정미 Dec 04. 2024

비밀이 많을수록 마음은 병든다

장희빈, 희대의 악녀라 불린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이야기는 여러 번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소재가 되기도 했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장희빈역이라 하면 김태희 씨나 김혜수 씨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겐 다른 장희빈이 있다. 1988년에도 장희빈의 이야기가 중심이었던 드라마가 있었다. 조선왕조 오백 년: 인현왕후. 전인화 씨가 그때 당시 장희빈 역할을 맡았었고 아름다운 미모에 뛰어난 연기력으로 드라마는 무척 유명세를 탔었다.

 

그 당시 만 10-11살쯤이었던 나는 오빠와 할머니와 한방에서 잤었다. 나는 늘 할머니가 틀어놓으셨던 가요무대, 전설의 고향, 사극 등을 보다가 잠들곤 했다. 조선왕조 오백 년이란 드라마가 인기가 많아지면서 할머니도 그 시간을 빼놓지 않고 보셨다. 그리고 장희빈이 나오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엄마를 닮았다고 같이 욕을 해댔다.


"저 봐라 저 눈 째려보는 게 니 에미랑 똑같네"

"저 표독스럽고 못되게 하는 게 어찌 니 에미랑 저리 똑같을 고. 나쁜 년, 못된 년 같으니라고"

"어휴, 저 씹어먹을 년, 죽일 년"


오빠가 있던 내가 있던 상관없이  할머니를 매일 일주일에 2번씩 1시간 동안 드라마를 보면서 엄마 욕을 해댔었다. 지금은 드라마가 8부작이니 길어도 16부작이면 끝나지만 그 당시 대하드라마는 기본이 50부작이었고 인현왕후는 인기가 많아 70부작 가까이했다. 거의 일 년 가까이 한 셈이다. 그렇게 오래 욕을 하다가 그 일로 결국 사달이 났다.


인기가 많았던 드라마였으니 당연히 어른들이 모이면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집에 놀러 온 이모랑 엄마도 드라마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철없던 11살 나이는 나는 ' 엄마, 할머니가 장희빈 보고 엄마 닮았다고 하던데요.'라고 무심결에 말해 버렸다. 나는 어른들에게도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던 어린아이였다.


원래도 갈등이 많았던 할머니와 엄마사이에 또 다른 큰 싸움이 생겼고 그 일의 원인은 내가 되어 버렸다. 할머니는 나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한적 있냐. 어디서 그런 거짓말이냐! 지애미에게 못된 것만 배워 사람에게 뒤집어 씌운다'며 오히려 역정이 내셨다.  여름방학이라 놀러 왔던 큰 집의 고등학생이었던 사촌 오빠는 '너는 쓸데없이 그런 말을 왜 엄마에게 했냐?"며 또 나를 나무랐다. 그렇게 그 싸움의 원흉은 오롯이 내가 되었다.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함께 듣고 있었던 두 살 많던 나의 오빠도 나도 같이 들었다며 나서주지 않았고 어른들 중 그 아무도 나의 놀란 마음이나 죄책감을 달래준 사람은 없었다. 아마 그들 모두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최선의 방법이라 배웠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말 한마디로 큰 사단이 날 수도 있다는 것만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나는 말을 조심하는 아이가 되었다.


말을 잘 하지 않고 이리저리 옮기지 않는다는 것을 어른들이 알게 된 후 일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어른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곤 다들 비밀로 하라고 했다.


엄마는 할머니와 아빠의 욕을 하면서 절대로 할머니와 아빠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했고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도 엄마의 험담을 나에게 쏟아내면서 엄마가 알면 우리 다 끝장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어른들의 말들은 어느 하나 서로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도무지 나는 누구의 말을 진심이라 믿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나는 부모도 어른도 믿지 못했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나를 얼마나 병들게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우리 가족은 관계 안에서의 비밀도 있었지만 다른 비밀도 많았다.


'엄마가 중학교밖에 졸업 못했다는 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이모부가 바람피웠다는 거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돼'

'우리가 교회 다니는 거 할머니 알면 안 돼'

'아빠한테 00 샀다고 하면 안 돼'

'할머니한테 피아노가격 말하면 안 돼'등등 어린 나에게 비밀로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부모님은 남들에게 창피를 당할까 봐 가족들끼리 싸울까 봐 늘 전전긍긍하셨고 많은 것들은 함구되었어야 했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종류의 비밀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마음속에 짐을 얹어주는 것과 같다. 하루종일 이고 지고 다녀야 하지만 티도 낼 수는 없다. 자신이 짐을 지고 살고 있다는 것조차  남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거나 비밀을 만들게 된다. 부모님이 이혼을 했지만 외국으로 돈을 벌러갔다고 말해야 하는 아이들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거짓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게 남들을 속이고 거짓으로 포장하면서 사는 마음속에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들 수밖에 없다. 혹여 나처럼 실수로 비밀을 발설하게 된다면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은 사람보다 발설한 내가 더 욕을 먹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비밀은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골칫덩어리가 된다. 이런 복잡한 감정들을 해소하지 못하고 10년  20년 살게 된다면 당연히 마음은 지치고 병이 들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그때 당시 어른들이 나에게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해준 이야기들 중에 나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 나의 잘못을 가려주는 비밀이나 내 수치를 감추는 비밀들이 아니었다.  모두 다 어른들의 문제였고 그들의 미성숙함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들의 비밀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이 그들이 덜 싸우게 하는 방법이라 믿었다. 내가 힘들어도 그렇게라도 가정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관계는 절대로 건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부모님처럼 숨기고 감추는 것보다 오히려 드러내고 솔직해지는 편이  부모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훨씬 나았을 것이다.


솔직함이 무례함이 되지 않는다면,  웬만하면 비밀을 만들지 말자 . 그건  원하지 않는 타인의 짐을 이고 지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 문제만으로 복잡한 세상에서 굳이 타인의 비밀까지 이고 지고 갈 필요가 없다. 특별히 부모님이나 가족처럼  여러 갈래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더욱더 그렇다. 누군가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 그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느끼게도 해주기도 하지만 건강하지 않다. 오래 숨겨두고 묵혀둔 만큼 부패하고 냄새가 날 뿐이다. 마음이 건강해지고 가벼워지는 첫걸음은 자신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꺼릴낄것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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