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부자연(Artificiality,unnaturalness)의 삶, 갈등하는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
청년시절에 읽은 헤세와 최근 펼쳐 본 몇 권의 책들은(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수레바퀴 아래서) 마음의 가파른 정서를 비켜 문학의 순결함을 새롭게 전한다. 특히 대가들이 어릴 적부터 경험한 사계절의 변화와 시공간을 넘는 자연에 대한 무한의 애정, 헤세의 세밀한 묘사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는 자연과 더불어 성장하고 최종적으로 다시 하늘과 흙으로 회기 한다는 이치를 일깨운다
감정이 배제된 부호의 시대에 ‘신과 자연의 존재’란 어떤 것인가?
20C 초 청년 물리학자 하이델베르크와 원자 이론의 대가 닐스 보어가 숲 속을 걸으며 나누었던 대화,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함께 한 산책로에 붉게 피어 오른 수많은 장미, 토마스 만 마의 산에서 능선을 타고 쌓인 눈 더미와 얼음 틈에서 새어 나오는 으르렁 소리, 소로의 월든에 피어오른 아침 안개와 계곡에 흐르는 차가운 물 그리고 새들의 몸짓, 나무와 나무를 오가는 바람… 청설모의 사소한 속삭임마저 부드럽게 안아주는 위대한 자연의 섭리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도 자연에 순화되고, 논리와 이성은 낙엽에 묻혀 오로지 침묵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 고타마 싯다르타, 인류의 위대한 스승, 깨달은 사람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는 수많은 자기 발전의 단계를 거치며 정신과 자연, 사상과 육욕, 선과 악의 대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단일성의 한 극으로서 똑같이 긍정되는 자기완성에 이른다.
“태어남과 죽음은 단지 개념일 뿐, 죽음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Birth and death are only notions. No Death, No Fear. They are not real.)”
진리의 자리는 오고 감이 없다. 몸과 마음을 자기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시간을 초월한 평화를 느낀다. 분별이나 불안, 분리의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마침내 큰 깨달음에 도달한다. 무게가 무거울수록 울림은 크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울림을 느낄 수 없다.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소리는 잘 들을 수 없다
삶은 급행열차와 같다! 다들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어느 역이든 서지 않아도 좋으니,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좋으니,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기만을 원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게임의 규칙이 불공정하다고 생각 하기에, 누군가 목적지에 도착하더라도 상대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고 시기하며, 먼저 도착한 이의 휴식을 방해하고, 험담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이 불공정 경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경쟁에서 패하면 자칫 이 사회의 노비로 전락할 수 있으므로, 물론 경쟁의 종착지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모른다. 경쟁에서 어떻게 든 살아남기 위해 패거리를 만들고, 위계적인 갑질 관계를 일상화하고, 자칫 자신도 이 경쟁 속에 죽임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타인을 짓밟기를 서슴지 않는다. 시민 사회를 지탱하는 공적 가치를 믿지도 않고, 내면화해본 적도 없기에 논리보다는 기분에 좌우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비와 강짜와 아첨에 의존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신념 하에 고성을 지르다가 가끔 보게 되는 타인의 전락만이 그 와중에 지쳐버린 자신의 마음을 달래 준다. 바위와 함께 굴러 떨어지는 동료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산비탈의 시시포스처럼!
이탈리아 시인이자 영화감독 파올로 파졸리니(1922~1975)는 “태양은 뜨겁고 세상에는 쓰레기뿐”이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다들 고만고만하기는 하지만 속잎이 엉망진창인 삶 속에서 자신을 소진하다가 맞게 되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
삶에 존엄이 깃드는 미래는 불가능한가… 우리가 탄 급행열차의 종착지에는 무엇이 기다고 있단 말인가? 이따금 기적이 일어난다. 삶의 고단함과 허망함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무임승차자가 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한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도 인생은 쉽지 않다. 삶은 고단한 것이니 사람에 대한 예의는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데 있다. 삶이 고단하다는 것은 상당 부분 동어반복이다.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이다” -
붓다가 제자들에게 말한다. 법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고, 수행해서, 성취하라. 마치 청정한 행동이 길게 이어져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처럼 그런 행동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영혼과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법이란 무엇이겠는가?
네 가지 늘 마음속에 두고 생각하는 성질(四念處),
네 가지 노력(四正勤),
네 가지 불가사의한 영력(四神足),
다섯 가지 세력(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성질(七覺支),
여덟 종류로 이루어진 길(八聖道)이 그것이다.
이들 법을 나는 알고 말을 하지만
너희는 그것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고,
수행해서,
성취하라.
마치 청정한 행동이 길게 이어져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처럼 그런 행동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영혼과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붓다, 행복한 사람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나이는 한계에 이르렀다
내 남은 수명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버리고 떠날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귀의하는 것을 이루었다.
헤르만 헤세는 소년 시절 신학교에서 뛰쳐나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마주한다
예수께서는 올바로 살기 위하여 고통과 헌신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우리 삶의 기쁨과 의미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예수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다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내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도록 “悔改 – METANOIA” 즉 길을 바꾸고, 되돌아서, 세상을 변혁하는 신념을 다지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말한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라고 보다는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 말로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예수는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한다는 것,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에 새기는 것,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지금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고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와 노력으로 들어간다.
예수는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할 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에게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는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유별나고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공평함을 회복하려는 ‘노력’ 일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예수는 세상의 저명한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양심과 윤리로 무장하고 모든 사람의 존경과 신망을 얻는, 그러나 정작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변혁이 아니라 동정과 시혜의 방식으로만 접근하여 그 고통의 구조를 영속화하려는 모습을 위선이라 폭로한다.
예수는 강철 같은 신념으로 어떤 고정관념이나 교조도 없이 한없이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 든 저쪽에서 든 칭찬받고 존경받으면서 예수의 길을 간다고 함은 참으로 가소롭다.
예수는 획기적인 패러다임으로 바로 인간 평등의 존엄성을 실현하며, 한 사회에서 가능한 최하위 소외된 계층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다준다. 모든 남녀노소가 신분과 나이, 성별, 학식의 고하를 막론하고 한 자리에 앉아 같이 찬송가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의 혁명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가고자 하는 길, 수난이 아닌 영광의 길을 선택하려 할 때,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자괴감, 절망에 빠져든다. 예수는 2천 년 전에 몸은 죽었으나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살아있다고 생각합니까?” 구 시대의 지배체제, 앙시앵레짐이 그토록 예수를 죽이고자 한 의도를 지금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더 이상 교회의 전유물이 아니며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에게 성찰의 자리로 오도록 초대한다. 공포와 번민을 그대로 느끼면서 그것을 이겨내는 자,
우리는 가장 인간적일 때 비로소 신적일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신적일 수 있다
김교신, 함석헌에게 큰 영향을 끼친 日本人 “우찌무라 간조” 평전을(양혜원 교수) 읽으며 나는 종교에 대하여 고민한다. 딱히 기독교인은 아니나 가끔씩 저녁 무렵 인적이 드문 성당, 교회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예수와 베드로를 생각하며 부처의 깨달음이 어디에 계시는가 스스로에게 문답한다.
헤르만 헤세, 위대한 작가는 시간에 묶이지 않고 불멸의 작품으로 시대의 가치와 정신을 넘어서는 예지력과 공감력을 지니고 있다.
수레바퀴 아래 깔린 현실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하여 절망을 뛰어넘는 싯다르타의 지혜가 내게도 필요할 듯하다. ‘22년은 어느 해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제는 차분하게 뒤를 그리고 앞을 내다보련다.
빛나는 태양 아래 동막 갯벌을 옆으로 하고 한 걸음 씩 발을 내디디며 해야 할 일을 짚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