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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Dec 03. 2023

그날의 사마리아 여인

그날의 사마리아인

4월의 초입이다. 여행을 떠나려 일상의 상념들을 툭 털고 길을 나섰다. 아침 일찍 강남 대치동으로 가는 길이다. 봄 향기가 물씬 풍기는 가로수는 바람에 몸을 싣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전철 3호선 대치역과 2호선 선릉역 중에 망설이다가 2호선 선릉역에서 내리면 더 가까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노선을 선택하였다.


선릉역 2번 출구로 나왔다. 낯선 곳이라 너무 막막해서 높은 빌딩 숲을 올려다보았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때다. 내 옆으로 빠른 걸음을 옮기는 사십 대 중반을 넘긴 여성을 만났다. “저기요. 저는 대치 4동 성당을 찾고 있어요. 혹시 아시면 좀 가르쳐 주세요.” 핸드폰에 나온 지도를 보여 주었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금방 표정을 수습하였다. 나와 핸드폰을 번갈아 가며 들여다보다가 지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음, 여기에서는 꽤 먼데요.”라고 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럼 어느 쪽으로 가는지 방향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하자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침 저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 따라오십시오.” 그녀는 길을 안내해 주겠다며 앞장섰다.


문밖을 나서면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하루에 만나는 사람의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데, 평생에 걸쳐 만나고 헤어진 숫자를 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혈연, 지연, 학연, 이웃, 회사 동료, 취미생활 혹은 종교단체에서 관계를 맺고 사람들의 홍수 속에 떠밀려 살아간다.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만나고 헤어지고 사람들 속에서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한다. 수많은 사람 중에는 특별한 인연도 있었다.


그녀를 오늘 처음 보았다. 연인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길 위치를 잘 모르는지 몇 번씩 두리번거렸다. 녹색 가방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오른손에 쥐고 엄지와 검지로 인터넷 지도를 밀고당기기를 했다. 내 표정을 살피며 옆눈으로 도로 검색을 살짝살짝 확인하더니, 미안해하는 눈치를 보이며 가끔 미소도 지었다. 출근 시간대에 민폐가 될 것 같아 마음을 졸였다. “초면에 신세를 지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제 혼자 찾아갈 테니 빨리 출근하세요.” 한참 걸어가도 길을 잘 찾지를 못했다. 무료한 틈새를 이용해서 여행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씩 끄덕끄덕해 주었다. 골목길을 돌다가 “저기, 대치4동 성당이 있어요.”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반가웠다.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는 쪽을 보았다. 드디어, 찾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그녀도 뿌듯한지 보름달처럼 얼굴이 환했다. 막 발길을 돌리는 순간, 허리와 어깨가 축 처져보였다. 측은해서 달려가 덥석 끌어안았고, 한참 동안 시간은 정지되었다. 얼마 후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딸이 친정엄마 품에 안긴 모습이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사람처럼 큰 소리로 흐느꼈다.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내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동시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원피스를 입은 앞자락에 눈물이 흘러 빨간 카네이션 두 송이가 얼룩으로 생겼다. 드라마보다 더 찐한 만남이 기적처럼 일어났다. 이런 상황과 마주치려면 로또 당첨보다 확률이 낮다. “여사님, 빨리 출근하세요.” 핸드폰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이었다. “어쩌지요. 저 때문에 지각했잖아요.” 그제야 팔을 스르르 풀었다. 손등으로 눈물 자국을 닦으며 “빨리 가면 됩니다.” 하더니 이상하게 한참을 가지 않고 미적거렸다.


“사실은요. 친정엄마가 한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현기증이 났다. “어머나, 세상에! 큰 슬픈 일을 당하셨군요.” 어찌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가슴으로 흐느끼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오다가 점점 소리가 굵어졌다. 대학병원에서 일 년 동안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더 이상 차도가 없었고, 말기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며 울먹였다. 아까 나를 쳐다보다가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이 번뜩 스쳤다고 했다. 혹시 엄마가 다시 살아나서 딸네 집을 찾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 그 말을 한 뒤에 총알같이 골목길로 뛰어갔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가 그녀의 엄마처럼 따뜻한 품이 되어 준 것일까. 한참 동안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세상인심이 옛날 같지 않다고, 사람들은 많은데 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선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게 자기 몫을 하며 삭막한 세상의 탁한 흐름을 순화시켜 준다. 여행 중에 따뜻한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오늘 같은 일은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귀한 인연이었다. 생각할수록 엄마를 잃은 그녀가 측은했다.


이층 성당으로 올라갔다. 눈물 자국이 얼굴에 번들거렸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십자가를 쳐다보며 지금껏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누구에게 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준 적이 있었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지. 내가 만약에 출근하다가 그 입장이 되면 길 안내를 친절하게 잘해주었을까.’ 오늘부로 나도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살기로 다짐하였다. 갑자기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의 친절한 마음이 잠자던 내 마음을 흔들어 깨워주었을까. 그녀에게 풍기던 향기를 내 가슴에 가득 안고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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