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설이다. 동짓달 친정엄마 제삿날에도 찾아뵙지 못했다. 이번에는 몇 년 동안 코로나로 걸음이 멀어졌던 친척집도 방문하고 부모님 산소를 돌아보고 싶었다. 여행 준비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서니 낯선 할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화들짝 놀라 뒷걸음쳤지만 그리움이 쌓인 고향 생각에 서둘러 나섰다.
폭설로 버스가 거북이처럼 기어갔다. 가로수들이 하얀 솜사탕을 물고 손을 흔들었다. 젊은 시절 명절 때마다 친정에 가지 못한 불만이 쌓여도 남편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돌아보니 시간에 쫓기며 아등바등해도 남들보다 이룬 것이 없지 않은가. 친구들이 부부 동반해서 해외여행을 수시로 다녀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국내 여행도 자주 가지 못해 아쉬워했었다. 옷매무새를 만지는 것을 보고 남편은 나를 앞세우고 당신 고향 집으로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친정엘 가겠다는 내게 혼자 다녀오라더니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 선뜻 따라나섰다. 창밖의 풍경을 보니 사촌들이 아슴아슴 떠올랐다.
설이 다가오면 종가인 우리 집은 장날마다 제수를 사다 날랐다. 설맞이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할 일이 많았다. 마당에 태산같이 쌓아놓은 놋그릇과 재기들을 닦아야 했다. 추운 날씨에 고사리손을 호호 불며 기왓장을 돌확에 콩콩 빻았다. 채로 친 고운 기와 가루를 볏짚에 묻혀 요리조리 닦으면 황금색으로 변했다. 부엌 청소와 방 청소도 나의 당번이라 미리 해 놓았다. 싸리비로 앞마당, 뒷마당, 골목길까지 비질을 하다 보면 무척 힘들었지만 신바람이 났다. 사촌, 오촌, 육촌들이 객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설을 맞으면 우르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믐날은 아이들이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서 구들방에 둘러앉아 발은 부챗살처럼 다리를 가운데로 뻗고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아이들은 설날 세뱃돈을 받아 복주머니에 채워질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가까이 다가오니 더 신이 났다.
친척들은 현실의 무게와 타향살이를 토로하며 땅에 묻어두었던 알밤을 까거나 상어고기(돔배기)를 골패 쪽처럼 썰어서 꼬치에 끼웠다. 엄마와 나는 며칠 전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어 놓았고 쌀가루를 쪄서 떡메로 수없이 내려쳐 쫀득한 떡가래도 뽑아놓았다. 숙모들은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배추전과 지단을 붙이고 삼색나물과 오색백과도 준비했다. 설맞이 준비로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을 내려놓고 형제간 친척 간에 돈독한 정을 쌓느라 하하 호호 즐겁기만 했던 시절은 어른이 되어도 눈에 선했다.
결혼 후 매년 시댁으로 설맞이를 다녔다. 친정 방문은 바라기만 했지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신혼부터 우리 부부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하는 일마다 뒤틀리기가 일쑤였다.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말처럼 설날 친정걸음은 왜 그리도 굼떴는지…. 마음만 먹으면 하룻길인 것을. 가파린 인생길을 돌아와 이제야 그 길을 나섰다.
북어와 소주 한 병을 준비해 부모님 산소로 올라갔다. 동생이 매형과 누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올라왔다. 산소를 둘러싸고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도 정이 그리운 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흰 눈이 덮인 뫼 봉우리에는 묵은 잔디를 밀어내는 파란 싹이 얼굴을 내밀었다. 처남남매간에 간단한 상을 차려놓고 절을 올리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따뜻한 쌀밥 한 그릇도, 여행 한 번 시켜 드리지 못한 회한이 수면 위로 떠올라 망부석처럼 서 있다가 올케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왔다.
동생이 잡아 온 물고기로 백년손님을 위해 얼큰한 매운탕을 끓였다. 밤이 늦도록 쌓인 회포를 풀다가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남편과 나는 깨우지 않아도 벌떡 일어나 영험하다는 비봉산(飛鳳山)으로 올라갔다. 탁 트인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노랗게 대지를 물들이며 해가 솟아올랐다. 야호! 맞은편 능선에서 메아리로 화답을 해왔다. 순간 양손이 가지런히 모았다. ‘올해는 가족의 건강과 이웃들이 희망을 실현하게 해 주소서.’라고 간절히 빌었다. 해마다 작심삼일로 끝난 새해 계획을 다시 갱신하고, 뜬구름 잡던 생각도 멀리멀리 날렸다.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 상큼한 솔숲의 향기가 오감을 자극했다. 나의 탯줄이 묻힌 모천에 해묵은 잔상들을 묻었다.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태고의 신선 나라에 온 듯 황홀한 신비감에 휩싸였다.
저녁이 되자 동생이 한옥 방에 군불을 지펴 놓았다. 방문을 열자 향긋한 흙냄새가 코끝으로 다가왔다. 설맞이로 강행군하느라 팔다리가 쑤셔 벌떡 누웠다. 예나 지금이나 시누이는 손님일까. 올케가 잿불에 묻어두었던 군고구마를 꺼내왔다. 까맣게 탄 껍질을 벗기고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달곰한 향과 육즙이 흐른다. “아, 바로 이 맛이야! 자네가 최고야!” 이런 마음을 헤아린 듯 밤하늘의 별빛도 잔잔히 흐른다. 황소바람을 막아주는 문풍지 울음소리와 따뜻한 구들방 기운을 품고 내일에 대한 그림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