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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스 Mar 04. 2022

소주 한 잔에, 딱딱한 라면


의식주의 ‘식’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엄마의 하루는 주방에서 시작해서 주방에서 끝이 난다고 말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는 정말 먹는 것 생각으로 시작해서 요리하고 먹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 이 정도면 브런치에 음식 이야기를 쓰고 있는 사정이 설명되리라.


반면 11년 째 한 솥밥을 먹고 있는 나의 세대주는 기본 ‘식’만으로도 만족을 느낀다. 같은 반찬이 3일째 상에 올라도 배만 부르다면 크게 불만이 없는 나의 남편. 우리 부부의 ‘식’에 대한 욕구가 쾌락으로 일치했다면 지금쯤 나의 살림은 나락의 초입 어딘가일지도 모르니 다행이라 해야겠다.    


하지만 그런 그도, 라면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라면’이다. 물론 ‘그냥’ 라면은 아니다. 그렇다고 특정 ‘브랜드’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역시 다른 식재료를 잔뜩 넣어 끓인, 퓨전의 그런 라면 또한 아니다.


금요일을 불태우는 밤, 굳이 마룻바닥에 상을 펴서 투명한 소주 한 잔을 곁들이는 완전히 익기 직전의 라면.

그것이 그의 소울푸드이다.     





남편은 애주가였다.

저녁 상을 위해 3,4시간씩 주방에 서서 요리를 해야할 만큼, 실력은 없고 열정만 넘쳐났던 초보주부 시절.

그 어떤 음식을 상에 내어도 남편은 갖은 핑계를 들어 반주를 했다. 이를테면 두부와 김치가 있으니까 소주를 마셔야하고, 동태탕은 시원하니 한 잔을 해야하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결혼하고 반 년 만에 첫아이를 가지고, 가능한 직접 만든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고 애를 썼다. 출산까지 단 한 번 먹었던 햄버거가 내 기준의 정크푸드의 시작이자 끝이었으니 무던히도 참고 노력했다. 이런 나를 곁에서 보던 남편은 술을 줄여갔다. 습관처럼 한 박스 씩 사다 날랐던 소주는 어느 사이인가 우리의 장보기 목록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불금, 소주와 라면의 조합을 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10년 전 당시 유행했던 금요일 밤의 오디션 프로그램의 오프닝이 시작될 무렵이면, 남편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 눈치를 보아가며 라면 봉지를 뜯었다. 요리라 부르기 민망한 계란후라이, 전기밥솥 밥하기, 미역국 정도를 만들 수 있는 남편이었지만, 라면을 끓일 때만은 그 언제보다 진지했다.


전신의 감각을 동원해 라면물을 맞추고, 자욱한 수증기가 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끓을대로 끓은 큰 물방울이 터지기 시작하면 스프를 털어넣고는 부수지 않은 라면을 통째 넣었다. 티비 속 가요들을 따라부르며 면이 저절로 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젓가락으로 면을 들었다놨다를 반복하는 남편의 바쁜 손. 대충 면발 겉면이 투명해질 즈음 계란 한 알을 넣으면 남편의 라면 요리는 끝이 난다.


사실, 남편이 끓여준 라면을 처음 먹었을 때 나는 심하게 체했다.

생면이래도 될 것 같은 식감과 밀가루 향이 그대로 올라오는 그의 라면은, 그간 푹 익혀 국물이 졸아들때까지 끓여 먹던 나의 라면과는 몹시 달랐다. 그 다음부터 나는 라면을 더 익혀달라고 주문했고, 우리는 생면과 퍼진  중간 어드매 쯤의 타협점을 찾아갔다. 하지만 혼자 먹는 그의 라면은 지금도 여전히 생라면이다.


꼬들하다 못해 딱딱한 그의 라면에는 사연이 있었다.

남편은 퇴근 후 고요와 어둠만이 존재하는 작은 집에서 홀로 10년을 살았다. 적막이라도 깨보려 지루한 티비 소리에 의존했고, 외로움을 털 듯 소주를 마시며 애주가가 되었갔다. 늦은 밤 소주 한 병을 마실 동안 만큼을 버텨줄 면발이 필요했으니, 딱딱한 그의 라면은 생존의 룰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한 달에 한 번 라면을 먹는다.

노화는 핑계가 아닌 팩트로 돼 버렸고, 소화력이 약해진 탓에 밀가루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 한 번의 기회를 놓칠리 없는 남편은 여전히 그 꼬들한 라면과 함께 맑고 투명한 소주를 마신다. 건강을 이유로 남편의 음주를 말리고 싶은 나이지만, 라면과 소주의 공식은 가볍게 눈 감아준다. 내가 남편을 알지 못했던 10년의 시간, 그를 지켜주었던  소울푸드였으니까.

      

오늘도 남편은 불금의 조합을 찾을테지.

냄비에 물을 올리기 전 "당신도 먹을거야?"라는 질문도 할테고,

 늘 그랬듯 "NO"라고 외쳐야지.


하지만 오늘 역시, 당신의 소울푸드를 딱 한 입만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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