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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Jul 03. 2023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다


종양 수술 날짜가 잡혔다. 방학 직전에 잡혀 4일 정도 병가를 내게 됐다. 주변 정리할 것과 입원 준비물을 하나씩 챙기다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하기로 했고 직접 작성 기관에 방문해야 한다기에 되는 날짜를 잡아 다녀왔다. 그동안 생각만 많았으나 수술을 계기로 행동하게 된 거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에 대한 회의


남은 사람의 미련이나 미안함의 감정 때문에 다루기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결정을 떠넘기고 싶지도 않고, 또 백세 가까운 노인의 말년을 생생하게 보아왔던 터라 무의미한 연명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당사자의 의지에 따른 적극적 안락사도 찬성한다) 천천히 성취하며 사는 삶을 살았던 것 같고 별이를 키우면서는 삶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샘솟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터부 삼고 싶지 않다. 터부 삼고 싶지 않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고통은 두려워도 죽음은 두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고통도 죽음도 두렵다. 더 정확히는 고립이 두렵다. 나는 생성되는 그 순간부터 누군가와 함께 있었는데 그 모든 것과의 연결고리가 끊긴다면 정말 두려울 것 같다. 두려움을 느끼는 '정신'이라는 것이 그대로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까지 겪어 본 것 중 가장 큰 수술을 앞두게 됐고 다행히 그 분야에서 그리 큰 수술은 아니라지만 전신마취가 참 부담스럽다. 첫째로 나는 전신마취 상태일 때 내 정신이 어디로 가 있는지가 궁금했다. 잠시 육체를 벗어나 있는다면 임사체험 같은 걸 할 수 있을까. (한 경험자는 그냥 필름이 끊기는 기분이라고 하며 별 생각 다 한다고 내게 면박을 주었다.) 수면 마취로 세상을 뜬 케이스도 가까이에서 목격한 후로는 '마취'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상당히 세다. 내일이 어떤 하루가 될지는 미지의 영역이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빨리 하자 싶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알아 보기
출처 https://www.lst.go.kr/


19세 이상의 성인인 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 작성한 의향서는 국립연명의료기관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고 의료진이나 가족의 열람 여부를 미리 선택해 둘 수 있다. 한번 의향서를 작성했다 하더라도 본인이 원할 때에 철회할 수 있고 철회 후 재작성할 수도 있다.



의향서 작성 기관을 방문해야 하는 이유는 본인 확인 및 아래 사항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타이틀만 보아도 어떤 내용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지만 등록기관 상담자로부터 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나서 확실한 의향을 남겨둔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보였다. 연명이나 죽음을 가볍게 다루지 않고 대면한 상태에서 직접 의향을 묻는 과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관을 방문하고 여러가지로 실망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뒤쪽에;)




의향서 작성 기관 상담자의 설명사항으로 제시된 내용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사이트에서는 아래와 같이 동영상으로 제도를 설명하고 있다.

                                                https://youtu.be/fgGg5D66t1w



연명의료결정법의 제정 계기로 '보라매 병원 사건'이 언급된다. 영상 스크립트가 올라와 있어 아래에 붙여 본다.


1998년 머리 충격으로 인한 경막외 출혈상으로 응급후송되어, 긴급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중이던 환자가 있었습니다. 가족이 강력하게 퇴원을 요청하자 의료인은 환자가 사망할 경우 보호자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받고 퇴원절차에 협조하였습니다. 얼마 후 환자는 사망을 하였고 그 의료인에게는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데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살인 방조죄가 적용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환자의 의학적 회생가능성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담당의사가 부당한 퇴원 조치에 응했고 환자가 그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의료계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여 환자가 사망하면 의사가 처벌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공호흡기 장치는 한번 달면 의학적으로 소생가능성이 없어도 뗄 수 없는 장치로 인식 되어 왔습니다.
한편 2008년에도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의학적으로 회생가능성이 없다면,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른 바 ‘김할머니 사건’인데요 대법원은 어떠한 근거로 이러한 판결을 내렸을까요?
이 사건에서의 김할머니는 평소 “내가 소생하기 힘들 때 호흡기는 끼우지 마라. 기계에 의해 연명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자녀들에게 하셨었으며, 이는 자녀들의 증언으로 연명의료에 대한 본인의 생전 의사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대법원의 판결에도 실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야 하는 의사들의 부담은 줄지 않았고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었습니다.
- 출처 https://www.lst.go.kr/


그러면 그렇지! 이 제도는 인간의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막강한 진상이 의료계를 뒤흔들어 놓고 그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가 일자 이를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가 의향을 밝혀 놓는 것이 가족들에게 좋은 결정임은 물론이거니와, 의료인들에게도 마음 편한 결정이 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처치 행위를 보호받을 수 있을 때에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어찌 좀 떨떠름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신청서를 쓰러 가기로 했다. 이러나 저러나 내 생각은 동일하니까.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기관 찾아 보기


https://www.lst.go.kr/


사이트에서 지도상 가장 가까운 작성 기관을 찾아 준다. 검색결과 집에서 가장 가까운 00병원에 갔다가 퇴짜를 맞았는데, 이 병원에서는 임종을 앞두고 있거나 호스피스로 옮길 예정인 환자들에게만 창구가 열려 있다고 했다. 성인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다고 들었다 되물으니 다른 데는 모르겠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위 두 경우에만 제한하고 있다나. 어쩔 수 없지 돌아나와 건강보험공단 대표전화로 연락해보니, 공단에서는 대부분의 지사에서 연명의료신청서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하루를 날리고 다음날 가장 가까운 건보공단 지사를 찾아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검색결과를 그대로 믿지 말고 미리 전화해서 임종을 앞둔 사람이 아니어도 작성할 수 있는지 문의 해 보는 것이 좋겠다.




상담 및 신청서 작성하기


공단이라고 뭔가 체계적으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신청서 양식에 기본 사항을 적고 전달하니 바로 태블릿에 사인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충분한 상담과 설명을 듣고 서명하라'고 되어 있던데 그 과정이 필요 없느냐 되물었다. 그제서야 대충 설명하는 상담사.. 심지어 이 항목이 설명하는 바가 뭐냐고 물어도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는 답을 듣기도 했다. 와, 이건 너무 하잖아요.


작성 시 유의사항 - 출처 https://www.lst.go.kr/
이런 확인 서명도 해야 한다



신분증 확인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설명이 부족해서 과연 미적지근한 서명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고민할 겨를도 없이 태블릿에 사인하라는 거 하니까 저기 들어간 채 인쇄되어 나왔다ㅋㅋ



상담사는 주로 노인 분들이 많이 오시다보니 세세한 설명 보다는 필요한 것 위주로 설명한다고 변명했지만, 그게 핑곗거리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진행에 10분도 채 안 걸리는 간단한 절차였긴 해도 그보다 더 날림으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관련 설명과 이해를 필수 절차로 두어 꼭 방문 접수해야 하는 제도로 설계해 두었고 나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에 백퍼센트 동의하는데 정작 현장은... 말을 줄인다. 아무래도 의료인들의 책임 면제만을 위한 제도인가 싶기도 하고. 내가 방문한 지사만의 문제이기를 바란다.



나름대로 꽤 오래 생각했던 일의 실행이었는데 마치 등본 한 장 떼는 것처럼 빠르게 처리되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역시 깊이 고민하는 일의 대부분은 실은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교훈을 얻고 간다. 또는 나의 생사가 남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리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 자의식 덜고 가볍게 살자.




등록 내용 확인하기


사이트에서 본인 인증을 하면 등록 내용을 확인할 수 있고, 본인이 원할 때 바로 철회할 수 있다. 등록 후 30일 이내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이 우편으로 온다고 한다. 나는 신청할 때 가족이나 의료진이 내 신청 사실을 임의로 열람할 수 없도록 해 달라고 표시했다. 사실 별 거 아닐테지만 의식불명 상태에서 나의 이전 일을 남들이 들추어보는 게 그리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아서다. 대신 내 의사가 이렇다는 걸 구두로 말하고 등록증을 늘 지갑에 휴대하고 다니면 될 것 같다.



등록 잘 되어 있다


이렇게 버킷 리스트 하나를 지웠다. 이제 입원, 수술과 방학을 잘 흘려 보내고 멀쩡하게 회복된 상태로 개학을 맞이할 일만 남았다. 더 아픈 곳이 없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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