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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Nov 05. 2024

의자의 추억

꿈을 꾸었다.

요즘 자꾸 학교 때 꿈을 꾸는데, 시험인 줄 몰랐다가 시험지를 받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꿈, 교실을 찾아 끝도 없이 긴 복도를 헤매는 꿈, 심지어 수업시간에 몰래 도시락 까먹는 꿈까지 꾼다.

어젯밤엔 대학 때 도서관에 간 꿈을 꾸었다. 썸 타던 선배랑 도서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별안간 선배가 사라지고 안 보였다. 몹시 황당한 기분으로 깨보니, 남편 코 고는 소리가 천장을 찌르고 있었다. 막 달달하려던 순간, 남편이 자면서도 나를 방해한 게 확실했다. 깨지 못했다면 남편이 아예 내 꿈에 출현했을지도. 자다 말고 웃음이 났다.

오후에 산책을 하다가 기막히게 예쁜 의자를 보았다. 지나던 길 가 어느 집 정원 안이었다. 사진을 찍으며, 다시 꿈 생각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기적인 일이었지만, 대학 땐 같이 공부하고 싶은 친구의 도서관 자리를 잡아주곤 했다. 좀 늦을 것 같으니 자리 좀 잡아놔 달라고 친구가 먼저 부탁할 때도 있었다. 거의 매일 집회와 시위로 도서관 앞 광장이 잠잠할 날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시험기간엔 아침 일찍 자리를 잡기 위해 늘어선 줄이 장사진이었다. 새벽 공기에 덜덜 떨며 줄에 끼어 서있던 겨울이면, 우리들의 입김과 앞사람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아직 채 동이 트기 전 검푸른 하늘 위로 뽀얗게 날아오르곤 했다.

드디어 도서관에 입성하면 우선 빈자리에 옷이나 책을 두어 친구의 자리를 확보하고, 내 자리에 앉아 주위를 정돈한다 ⎯ 정성스레 책상 닦기, 가방을 열어 책들을 꺼낸 후 가지런하게 늘어놓기, 필통을 열고 괜히 필기도구 한 번씩 만져보기. 그러고는 가져온 책 중 가장 굵은 놈을 베고 엎드려 모자란 새벽잠을 보충한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 뽑아온 사이 내 자리에 앉아있던 메뚜기(자리가 없어 여기저기 빈자리를 뛰며 공부하는 사람)에게, 친구가 아직 안 왔으니 조오기 조 자리에 앉으시면 된다고 안내해 준다. 약간의 공부를 한 후 친구가 오면 학생식당으로 직행해 밥을 때리고, 즐거운 로비생활(도서관 여기저기 박혀있던 아는 얼굴들을 모아 로비에서 자판기 커피 마시며 수다 떨기. 우리는 스스로를 '로비'스트라 불렀다)에 빠져든다.

짧은 겨울 해가 뉘엿거릴 무렵이면 선택의 길이 열린다. 시험이고 뭐고, 아까 만난 로비스트들이랑 술 마시러 갈 건지 아니면  나머지 시간 열심히 공부하고 별 총총 밤하늘을 바라보며 집에 갈 건지.

학교 앞 골목에 즐비하던 술집의 불빛들도, 밤하늘 별빛들도, 그리고 누군가 내어준 옆자리도, 이젠 다 사랑스러운 기억이다.


논문 쓰는 데 도움을 얻으려고 정신과에서 하는 심리극(Psychodrama)을 열심히 쫓아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역할극에서도 의자는 중요한 소품이지만, 특히 '빈의자 기법'(맞은 편 의자에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앉아있다고 생각하고 의자를 보며 이야기함으로써, 인식하지 못했거나 부정하던 것들을 깨달아 자신 안에 통합하도록 돕는 치료법)에서는 의자가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그때 참관했던 여러 심리극에서, 나는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을 기꺼이 감당해 내는 의자를 보았다.

한번 직접 참여해 보라는 의사 선생님의 제안에 무대에 오르긴 했는데 너무 어색해서 땅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몰입되어 끄트머리에는 극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체험을 하기도 했다. 동그마니 놓여있던 의자 하나가 그토록 애끓는 감정을 불러올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영유아반 성경공부 교사로 함께 일하던 앨리스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 맨 처음 관찰하러 들어갔던 것도, 그녀의 마지막 수업을 함께 했던 것도 모두 앨리스가 가르치던 반이었다.

2014년 봄, 트레이닝을 마치고 반을 배정받기 전까지 다른 교사들을 돕고 있던 나는 앨리스와 함께 수업을 한 다음 날 아침, 앨리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팀 디렉터의 이메일을 받았다. 이틀 뒤 부활절에 앨리스는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작은 교회에서 그녀를 보내주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 미팅에서, 나는 앨리스가 늘 앉던, 이제는 비어있는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모두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그녀와의 추억을 말할 때, 나는 이제 앨리스의 의자는 여기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놓여있을 거라고 말했다.


내게 의자는 내어줌이고 아픔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한 흔적이기도 하다.

빈 의자를 보면 쓸쓸하지만, 또다시 누군가와 함께하게 될 거라는 기대가 생기기도 한다.

© Anna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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