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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이차 Jan 02. 2021

Good bye, 2020

   2020년의 마지막 밤. 연례행사처럼 벽걸이 달력을 바꿔 걸었다. 2020이라는 숫자가 채 익숙해지지도 않은 채 2021이라는 숫자를 마주했다. 20 다음에 2가 오는 게 아직까지 영 낯설다. 이전 달력을 내리며 달력에 적힌 기록들을 넘겨봤다. 대부분의 일정은 온라인에 기록하지만, 달력은 그보다 무게가 있는 기록이었다. 생일, 기념일 등 행사. 가족 모두의 기록. 한 장씩 넘기며 '맞아, 이땐 그랬지'하는 소소한 웃음을 나눴다.


   많은 것이 변한 한 해였다. 나 스스로도, 그리고 바깥세상도. 작년 이맘때쯤엔 아홉수의 시작이라 걱정했는데. 돌이켜보면 걱정이 무색하게 보낸 시간이었다. 성장통을 앓고 나서 훌쩍 크는 소년처럼, 2020년은 내 인생의 청소년기였다. 지독한 성장통을 지나 새로운 시작과 변화가 움텄다. 틔워 올린 싹은 시간과 함께 깊어지고 단단해졌다.


책을 가까이했다. 매일 6시 반에 사무실에 도착해서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출근하는 패턴이었는데, 코로나로 헬스장을 가는 일이 여의치 않아 그 시간을 독서에 할애했다. 퇴근 후 발레를 가는 날이면, 비는 시간 이용해 저녁 한 시간을 독서 시간에 추가했다.


책을 읽고 나서 짧게나마 기록을 남기는 습관을 들였다. 친한 회사 동료의 조언이 계기였다. '책을 10권 읽는 것보다 1권을 읽더라도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읽은 책을 포스팅으로 남기자. 4월 1일에 한 다짐이었다.


세 가지 규칙을 세웠다. 첫 째, 가볍게 한 두 문장으로 요약을 시작할 것. 둘째, 책의 핵심적인 내용을 메모할 것. 셋째, 기록으로 남기고 나의 언어로 개편해보는 경험을 할 것.


읽은 책의 개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갔고, 연말이 되는 지금 74권의 기록이 남았다. 기록과 함께 글을 써보는 경험이 남았다. 초등학교 때 쓰던 일기 이후로 제대로 된 정기적 기록을 남기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의 언어로 소화해낸 글을 쓰는 일이 꽤 즐거웠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브런치도 시작해보았다. 가볍게 시작한 독서 포스팅이 연말에 70여 개로 불어났듯, 브런치에서 남기는 글도 차곡히 쌓여가기를.


주어진 일이 아닌, 필요한 일을 했다. 마케팅 자동화를 주제로 프로젝트를 했다. 반복되는 마케팅 프로세스를 프로그래밍을 통해 룰셋화 시켜 간소화, 자동화하여 인력과 시간 등 제비용을 줄이는 일. 과거 마케팅 업무를 하며 답답했던 점을 바꿔보자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로, 마케팅 관련부서와 기획부서 지원부서의 담당자를 모아 TFT를 운영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PM의 경험을 했고, 프로젝트 기획운영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업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잡히지 않는 뜬구름 같은 프로젝트가 아닌, 바닥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고 실제로 회사의 이익을 창출하는 일이라 보람찼다. 열심히 발로 뛰어 프로젝트를 홍보하고, 의뢰자가 원하는 요건에 맞게 쿼리를 작성했다. 조건에 맞게 구동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하고 테스트하며 데이터 정합성을 검증하는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했다. 기존 시스템이 받쳐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때 안 되는 영역이라 포기하지 않고, 개발 파트를 다독여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갔다.


여러 사람들을 설득해나가는 과정이 때로는 힘에 부치기도 했으나 의견을 조율하여 성사시키는 과정이 즐거웠다. 쉽지 않았던 일의 연속이었지만 성취감이 각별했다. 이러한 성과와 노력을 최고 등급의 고과로 인정받았을 때 벅차올랐다. 잘 해낼 수 있는 일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맞닿았다는 쾌감. PM 커리어의 시작점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다.


사랑

평생 함께할 동반자를 만났다.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 스쳐지날 수 있었던 인연이 결국 이렇게 이어진다는 게 새삼 신기하다. 그와 함께할 가깝고 먼 미래를 그려나가는 시간이 즐겁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보며 알려주는 그 덕분에 매일 나의 세계가 넓어진다.


사랑은 헤어짐을 앞둘 때 더 진해진다고 했던가. 독립을 목전에 두니 내리사랑이 마음으로 와 닿는다. 매번 장난으로 30년 차 캥거루라고 하지만, 태어나 한 번도 떠난 적 없이-그 흔한 자취 한 번 않고 집의 온기를 만끽해왔다. 수십 년 품어왔던 딸이 품을 떠난다 생각하니 섭섭해서일까. 전에 같지 않은 부모님의 모습을 종종 본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표본으로 표현에 박했던 아빠가 '딸, 사랑해'라는 말을 수어 번 건넨다. 수년 전 언니를 결혼시키면서 그 빈자리를 느껴본 터라, 자식을 둥지에서 떠나보낸 후 적막함이 그려진다는 엄마. 내가 떠나면 텅 빈 집이 쓸쓸할 것 같다며 엄마가 슬몃 웃는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추억과 사랑으로 풍성히 채워야겠다.


   2021년은 또 어떻게 다가올까. 1월 1일이라 빨갛게 칠해진 달력의 숫자를 보며 식탁에 모여 앉아 떡국을 먹었다. 진하게 낸 멸치육수에 동글 납작 썰어낸 가래떡과 계란을 풀어넣은 엄마표 특제 떡국. 향기로운 김 고명을 잔뜩 올려 한 그릇을 비워냈다. 비로소 한 살을 더 먹은 기분이다. 다가올 나의 30대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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