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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 Jul 17. 2022

'플랜더스의 개' 넬로는 왜 루벤스 그림이 보고싶었을까

루벤스의 도시, 안트베르펜(앤트워프, Antwerp)
루벤스 동상 - 네로와 파트라슈의 동상 - 성모마리아 성당

안트베르펜은 17세기 바로크 시대 대표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도시다.


안트베르펜 시내에는 지금은 박물관이 된 루벤스의 집(Rubenshuis)이 있고, 성 야곱 성당(Sint-Jacob Antwerpen)에는 루벤스의 묘가 있으며, 성모 마리아 성당 근처 공원에는 루벤스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 성당(Cathe­dral of Our Lady Antwerp)은 1352년 공사를 시작한 이래 100년 이상 지속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2022년 6월 내가 안트베르펜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성당 외부는 보수공사로 큰 장막이 쳐있어 외관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성당 내부에는 회랑을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 각각 루벤스의 작품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1610)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1611~1614)가 있다.


이중 성당 회랑 우측에 있는 루벤스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는 '플랜더스의 개' 주인공 넬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림으로 넬로는 이 그림 앞에서 삶을 마감한다.


'플랜더스의 개'는 영국 작가의 소설이지만 우리에겐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더 익숙하다. 그 덕에 안트베르펜에는 유독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고, 성모 마리아 성당 앞에는 네로와 파트라슈의 동상도 있었다.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왜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가 아닌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림이었을까?


'플랜더스의 개'는 1872년 출간된 영국 작가 위다의 소설로 우유를 배달하는 가난한 주인공 넬로와 충견 파트라슈의 이야기다. 국내엔 일본판 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끌면서 알려졌다.


화가를 꿈꾸는 소년 넬로의 소원은 안트베르펜 성모 마리아 성당에 있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는 것이다. 성당의 그림은 평소 휘장에 가려져 있고, 그림을 보기 위해선 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거처도 없이 쫓겨난 넬로는 마지막 희망으로 미술 대회의 당선 발표를 기다리지만 여기서도 낙방하게 된다. 모든 희망을 잃은 넬로는 크리스마스 날에만 무료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러 성당으로 향한다.


어두운 성당에서 그림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침 생의 마지막 선물인 듯 달빛이 비쳐오고, 마침내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넬로는 여한이 없어한다.


그리고 넬로는 자신을 찾아 성당으로 따라 들어온 파트라슈를 안고, 루벤스의 그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아동 문학이자 애니메이션이라 하기엔 너무나 비극적이었고, 더욱이 다른 곳도 아닌 성당에서 그림을 보려면 돈을 내라는 야박한 처사가 놀라워 루벤스라는 화가의 이름이 유독 머릿속에 기억됐었다.


안트베르펜에 방문해 성모 마리아 성당의 루벤스의 그림을 보면서 왜 넬로가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가 아닌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앞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처럼 선한 삶을 살았던 넬로 또한 고난이 끝났음을 보여주며, 비록 죽음을 맞이했지만 신의 곁으로 떠났음을 의미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벨기에 브뤼헤의 Huis Ter Beurze(테르 뷔르제의 집)
지독하게 이문에 밝았던 플랑드르인


'플랜더스의 개'를 보면서 가장 신기했던 부분은 성당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보는 데 입장료를 요구했던 당시 플랑드르인들의 놀라운 사업 수완이었다.


'플랜더스'는 플랑드르의 영어식 발음으로, 플랑드르는 현재 벨기에 북부 지역을 의미하지만 17세기 초까지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을 포함하는 지명이었다.


플랑드르는 현재의 코인과 같은 과열 투기 현상이 있었던 17세기 튤립 파동이 일어난 곳이고, 세계 최초 증권거래소가 생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또한 플랑드르 지역이었다.


증권거래소를 뜻하는 영어 단어 bourse 또한 네덜란드어 beurs에서 왔다. beurs라는 단어가 증권거래소라는 뜻이 된 것은 플랑드르 지역인 벨기에 브뤼헤의 Huis Ter Beurze(테르 뷔르제의 집)에서 시작된다.


당시 벨기에 브뤼헤는 무역의 중심지였고, 브뤼헤의 Ter Beurze 가문이 운영하는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에 전 세계 상인들이 모이면서 다양한 상거래와 환전 등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Beurze는 거래소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고 한다.


안트베르펜에서 브뤼헤로 이동해 해당 건물을 찾아갔었는데 건물에 "Huis Ter Beurze"라고 표시되어 있어  흔적을 확인할  있었다.


플랑드르인들의 탁월한 경제관념은 플랑드르 지역 자체의 척박한 자연환경에 기인한다. 저지대의 비옥하지 못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무역이었고, 이들은 이문에 죽고 사는 셈에 밝은 장사치들로 성장하게 된다.


마치 좁은 땅덩이에서 유일한 재원은 남다른 교육열로 탄생한 인적 자원뿐인 한국과 같은 상황이었달까. 그 시절 플랑드르의 척박한 자연환경 속 결핍은 상인으로서의 성장 원동력이 된듯하다.


루벤스의 집(Rubenshuis)
내겐 너무 화려한 루벤스


넬로가 돈이 없어 볼 수 없었던 그림이 다른 화가도 아닌 '루벤스'의 작품이었기에 넬로의 이야기는 루벤스의 화풍, 그리고 그의 삶과 대비되며 한층 더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루벤스의 그림 속 인물들은 역동적이고, 웅장하며 육감적이다. 바로크 시대 화풍의 특징이지만 그런 루벤스의 작품들은 내겐 너무나 화려해 때론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루벤스는 당대 이름난 화가였지만 사회성도 좋아 교양 있고 매너 있는 미술가로 인정받으며 외교관 일도 했다. 거기에 사업 수완도 뛰어나 삶을 마감할 때까지 부와 명성을 유지했다.


가정사도 마찬가지다. 부인과 사별한 후에는 53세의 나이에 당시 대단한 미인이었다는 16세의 어린 아내와 재혼해 말년에는 가족들의 초상을 그리며 생을 굴곡 없이 마감했다.


안트베르펜에서 방문했던 루벤스의 집은 당대 부유층의 삶을 가늠할 수 있었던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주방과 식당, 방과 거실 등엔 그가 생전 수집한 조각과 가구,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수많은 방을 지나면 집 안쪽 정원이 나오는데 정원의 조각상은 마치 이곳이 루벤스 궁전이라 말하는듯했다.


루벤스는 전문적인 대규모 공방을 운영했기에 다작이 가능했고, 숙련된 제자들과 작업을 함께하며 공장처럼 작품들을 찍어낼 수 있었다.


이 공방 출신 대표 작가 중 한 명이 반 다이크(Anthony Van Dyke, 1599~1641)다. 반 다이크는 신동으로 인정받으며 19세부터 루벤스의 일을 도왔고, 루벤스는 반 다이크를 제자 중 최고라 칭찬했다.


실제로 루벤스와 반 다이크 작품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니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화풍을 가장 완벽하게 익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루벤스와의 인연으로 안트베르펜에는 반 다이크의 동상도 있다.

반 다이크 동상 - 루벤스 동상과 안트베르펜 성모마리아 성당

루벤스의 화려하고 때론 탐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화풍과 공장처럼 찍어낸 수많은 그림들, 그리고 그로 인해 부유했던 그의 삶이 '플랜더스의 ' 넬로의 안타까운 사연과 더욱 비교되면서 아마도 그의 작품이  불편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예술가는 오히려 사후에 더 큰 명성을 얻게 되고, 운이 좋아 살아생전 명성을 얻었다 한들 말년까지 이를 유지한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살아생전 그렇게 잘 나갔던 렘브란트도 말년엔 아내와 아들이 모두 사망하고, 파산하며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과 대비되는 예술가들의 불행한 인생을 접할 때면 비록 삶은 비극적이었다 하더라도 고통과 시련을 예술로 승화시켜 역작을 남길 수 있었다 여겼다. 하지만, 루벤스 앞에선 그저 예술가에 대한 편견이 되어 버리고 만다.


물론 루벤스는 화가로서의 실력뿐만 아니라 경영 마인드까지 갖춘 좀처럼 양립하기 어려운 재능을 지닌 다재다능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런 이유로 유독 루벤스 그림에선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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