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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daum Sep 16. 2022

4. 처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

경험

"안녕하세요. 통화 나누었던 북큐레이터 이혜진입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단정하게 들고 있던 가방을 다소곳이 앞으로 정돈하며 목례를 건넨다.

상담을 신청한 6살 딸을 둔 아이 엄마는 나만큼 살짝 어색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받아준다.

"네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


구두를 한편에 벗어놓고 낯선 집안에 첫 발을 내딛고 나니 잠시 소강상태였던 심장의 두근 거림은 터질 듯이 빠르게 뛰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나는 상담 신청 아동의 책 취향과 보유 도서들을 보고 싶다고 청하였다. 북큐레이터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이들 책 육아에는 꽤 관심이 있던  열성 엄마였던 터라 책에 관해서는    웬만큼 수다 떨 수 있다고 자신하던 사람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책방으로 나를 안내하고 책을 보여주었다.

"책은 많은 편이에요. 여기저기 중고책도 많이 샀고, 근데 잘 안 봐요. 유튜브만 보려고 하지.. 잘 때 한 권 정도 보는 정도예요. 책이라도 잘 보면 사줄 텐데.."

아이 엄마는 묻지도 않은 말을 쏟아낸다.


아마 한눈에 보기에도 꽤 낡은 중고도서와 연령에 맞지 않는 책들로 흥미는 많이 떨어졌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과 선입견은 피해야 한다.


"잘 봤어요~  어머님. 북클럽 어디까지 알아보셨어요?

주변에 이용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네 우리 애 친구가 하는데 그 엄마가 추천해줘서 상담 신청하게 된 거예요. 패드로 책 보고 책도 산다고.. 뭐 그 정도 알아요."

"그러셨군요~  우선 궁금해하셨던 북클럽에 대해 설명드리고 6살 아이 책 육아하는 방법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오늘 상담드릴게요. "  

대화를 하다 보니 나는 북큐레이터 이혜진이 아니라 그저 육아 선배이자 책 육아 전파자가 된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눌수록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육아 선배로서 현실적인 훈계와 꿀팁들을 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책을 왜 읽어줘야 하는지,

그림 읽기가 왜 중요한지,

부모와 책 읽는 시간이 왜 필요한지,

영역별로 편독 없이 왜 읽혀야 하는지,

누리과정을 거쳐 초등 교과과정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술 더 떠 아이의 유치원 생활에 대한 상담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떠들었다.

6살 아이의 엄마는 내 이야기가 재밌는지 끊임없이 아이 이야기를 꺼내어 이어갔다.


한참을 떠들다 어느 순간,

'아 이건 상담의 방향이 잘못된 것 같은데..' 생각 들어 다시 본래 목적을 찾아 설명하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미 나는 무엇인가를 판매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보를 전해주는 동네 마음 좋은 언니가 되어있던 것이다.

쉽사리 분위기 전환은 안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잘못된 것 같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교육과 관련된 정보전달이나, 아이의 생활 이야기에서는 반응이 좋던 아이 엄마가  본 상품 상담에서는 영 집중을 못하는 것 같았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이 집안에 들어온 지 두 시간이 넘게 흘렀다.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겠기에  어설픈 상품 설명 마무리를 하고 '생각해보시라'  여지를 남겨두고 집을 나섰다.


현관을 나와 단지를 터덜터덜 걸으며 멍해진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앞에 보이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하.. 나 뭐한 거지. 영업이 이래서 힘든 건가?

나 뭘 설명하고 온 거지? 부모 교육하고 나온 건가?

분위기는 좋았고  나도 재미있었는데 왜 이렇게 뭔가 빠진 느낌이지? '

마음은 일목요연하게 상품 설명하고 임팩트 있게 정리해서 멋들어지게 계약서 쓰고 인연을 맺을 것 같은 환상을 꿈꾸고 나왔는데 왜 동네 동생 만나 수다 떨고 나온 기분이지?

영 찜찜했다.


그래도 관계를 맺은 6살 아이 엄마가 남편과 상의해보고 연락 준다고 웃으며 말했으니 마음 한편에는 은근한 기대한 자락 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적어도 나는.


사무실로 복귀하여 상황을 설명하니 담당 국장님  얼굴에 모를듯한 미소가 번진다.

"호호호  혜진 씨 첫 상담 수고했어요. 연락 오겠지~  고생했어요. 아~근데 너무 기다리진 말고 "


그렇게 나의 어설프지만, 열정적이었던, 설레었지만, 두려웠던  첫 상담을 끝내고 하루 이틀, 시간은 흘러 일주일이 지났다.


6살 아이 엄마의  연락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의 전화도 받지 않고, 카톡을 읽고도 묵묵부답이었다.


하, 그냥 이번에 안 하기로 했다고 얘기해주면 되는 건데.. 자존심도 상하고 두 시간 넘게 목이 쉬어라 대화한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담당 국장님의 얼굴에 살포시 번진 미소의 뜻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나눈 대화에서 전달받은 피드백을  통해  상담시간이 매우 길었다는 것,

본질에서 벗어나 상대의 엄마 육아 스트레스 해소만을 해주었던 것,

많은 정보전달로 듣는 이로 하여금 부담을 느끼게 했다는 것, 여러 의미가  담긴 미소였고 그 미소에는  한마디로

'그 엄마 계약 안 할 거야~  기다리지 마세요~'

라는 뜻이 내재되어있던 것이었다.


하. 하. 하 그랬구나.


누구에게나 그렇듯 처음은 있다.

처음은 다 서툴고 어설프다.

지금  그 당시의 나를 생각하면 한없이 어설프지만 당시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아내던 그런 여자였다.

나 잘난 맛에 살던 콧대 높은 여자가 한순간 모양 빠지는 실적 없는 영업사원이 되는 순간이다.

입사한 지 두 달 즈음되던 어느 겨울날

나의 야심 찼던 첫 상담의 꼴사나운 결과를 맞이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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